시인 이육사의 생가와 이상룡 선생의 임청각

2025년 문경-예천-영주-안동 여행 (11)

by memory 최호인

1.


시인 이육사(1904~1944)의 생가는 원래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수몰 위험에 처했을 때 안동시 태화동으로 이전됐다. 혁국은 안동 시내를 지나가다가 어느 골목으로 자동차를 몰고 들어가더니 “여기가 이육사 생가야.”라고 말했다.


이육사 생가는 언뜻 봐서는 찾기도 어려울 듯했다. 딱히 눈에 띄는 표지판도 없어 보였다. 나는 시인의 생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하여 굳이 차에서 내려서 잠시 그 집 대문 앞으로 가보았다. 비좁은 골목에 있는 매우 허름한 집이었고 대문도 잠겨 있었다. 나는 겨우 까치발로 서서 낡은 철제 대문 위로 낡은 기와집과 마당을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던 듯 작은 기와집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일제강점기의 시문학을 배웠던 것이 떠올랐다. 김소월과 한용운에 이어 이상화와 청록파 3인방과 이육사와 윤동주를 배웠던 듯하다. 한국전쟁 때 이북으로 끌려갔다는 충북 옥천 출신 시인인 정지용이나 평안도 시인 백석 등은 우리가 어릴 때는 잘 알지도 못했고, 알고 있다 해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박정희 시대의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우리는 북한과 관련된 어떤 것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도록 교육받았다.


그래서 그나마 해방 전에 희미하게나마 두각을 나타냈던, 특히 일본에 대한 저항성이 강했던 이상화와 이육사와 윤동주는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감성을 지니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여 시를 쓰면서도 시대와 역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작품에 담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일제에 아부하고 굴복하거나 조선과 조선인이 당하는 고통을 외면한 채 문학을 추구했던 김동인, 노천명, 모윤숙, 유진오, 유치진, 서정주, 최남선, 이광수, 정비석, 채만식, 최재서 등 친일파 문학가들과 비교할 때 그 시인들의 위대함은 더욱 빛이 났다.


내 말은 문학이 꼭 시대와 사회의 불안과 민중의 고통을 담아야 한다거나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순수문학이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거나 그런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술과 문학은 미를 추구하지만 그 사회의 산물이며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와 역사와 결부 지어 해석된다는 것이다.


식민지 상황에서 또 수많은 조선인이 막대한 희생을 당하고 우리말까지 말살되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외면하거나 마치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한 문학과 예술인은, 꼭 반민족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의 성에 차지 못했다.


2.


본명이 이활인 이육사(1904~1944)는 안동에서 태어나 1925년에 대구로 이사한 후에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했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1931년에는 대구격문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1933년에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 졸업생이 되었으며, 1934년에도 잠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1943년 여름에 모친과 형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가 일제에 의해 검거된 후 베이징으로 압송되었으며 이듬해 1월 16일 순국했다.


그는 항일의식을 가지고 여러 필명과 호를 사용했는데 그 순서는 이렇다: 李活(1926-1939), 大邱二六四(1930), 戮史(1930), 肉瀉(1932), 陸史(1932-1944). 그래서 우리는 현재 그의 마지막 필명인 ’육사(陸史)’만 잘 알고 있다. 그는 생전에 시집을 출간하지 못했으나 1946년에 둘째 동생인 이원조가 유고시집인 육사시집을 출간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청포도) 그리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노래 부르게 하리라"(광야)라는, 학창 시절에 배웠던 그의 시구가 머리를 스쳤다. 해방 한 해 전에 죽어서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늘 '저항시인'이란 타이틀이 따라붙었던 시인, 이육사. 그러나 오늘 내가 본 그의 생가는 너무 밋밋하고 초라해서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육사는 화장된 후 유해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에 안동시로 이장되었다. 2004년에 안동에 이육사문학관이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번 짧은 여행에서 그곳까지 가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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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청각은 코로나팬데믹이 발생하기 바로 전해 뜨거웠던 여름에 다른 친구들과 여행하면서 들렀던 곳이고, 그때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딱히 큰 관심은 없었다. 그래도 이왕 온 김에 나는 임청각을 다시 잘 살펴보려고 했지만,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 임청각을 더 자주 보았기 때문인지 아예 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팬데믹 전에 왔을 때는 임청각 맞은편에 철로 이전 사업이 벌어져서 거대한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임청각은 원래 사가에서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 집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집이라 해서 일제가 70칸 정도로 줄이고 그 집 앞으로 중앙선이 지나가도록 했다. 그런데 2014년부터 임청각을 복원하는 사업을 하면서 중앙선을 이전했던 것이다.


아무튼 임청각은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1858~1932)의 생가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1911년 일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자치기구인 경학사, 교육기관인 신흥강습소 등을 차렸다. 신흥강습소는 후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어 무장 항일 운동가들을 양성했다.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는 만주지역에서 항일 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상룡 선생은 1925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국무령이자 제3대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임정의 내적 갈등이 지속되 이듬해 1월 임정 수반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갔다.


임청각은 1519년 (중종19년)에 지어졌으니 오백 년도 더 된 집이다. 나는 기꺼이 임청각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번 고택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팬데믹 전에 여러 친구들과 왔을 때는 이 오래된 고택 앞에 문화해설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때 해설사는 극심한 무더위로 인해 거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임청각에 우리 일행이 왔다고 반갑게 나오더니, 꽤 성의 있게 임청각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때 나는 그 고택의 기둥에 기대어 서서 수백 년 전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상상했었다. 수백 년 전에도 이 넓은 집에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약간 이상한 느낌을 준다.


시간이 주는 끝없는 변화와 인간의 삶의 연속성 같은 것 말이다. 그 집의 기둥과 마루와 마당과 주변 풍경 등은 사람과 세대가 변하는 것에 비해 훨씬 천천히 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그것을 상상하는 것이 나에게 왜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 모르겠다. 오래된 집, 특히 임청각은 나에게 그렇게 묘한 느낌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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