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의 하루 - 정독도서관부터 헌법재판소까지 3

2025 한국 여행 이야기 21

by memory 최호인

1.



가회동성당에서 나온 후에 우리는 헌법재판소로 향했다.

와이레스에서 꽤 시간을 보낸 이유는 헌법재판소를 단체관람하기 위한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걷기 페의 리더는 단체관람을 신청했고, 헌법재판소 안내 담당자와 만날 시간을 정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 건물은 가로로 넓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웅장하고 권위가 있어 보였다. 밝은 회색 건물의 옥상에는 정원이 있어서 푸른 나무들이 보였다. 드디어 경비원들이 지키는 입구를 거쳐 헌재 건물 로비로 들어갔다. 넓은 로비 뒤쪽 계단 위에 있는 창으로부터 빛이 들어와서 대리석이 깔린 로비 바닥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비 천장에는 중정 형태로 최상층 천장까지 뚫려 있어서 건물 내부 풍경이 전혀 답답해 보이지 않았다.


20251022_142345.jpg
20251022_144813.jpg


우리가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자 남녀 직원 두 사람이 나왔다. 여성 직원은 매우 친절하게 우리를 건물 여러 곳으로 이끌면서 헌법재판소의 기능과 건물 구조 등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남성 직원은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따라다니는 듯했다. 공무원 하면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융통성 없고 사무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들은 의외로 매우 밝은 모습으로 친절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먼저 로비에 관한 설명을 들은 후에 강당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강당에서 헌재의 역사를 담은 비디오를 관람했다. 여성 직원이 다시 나오더니 우리에게 ‘대한민국 헌법’이 적힌 작은 책자와 기념 볼펜을 나누어 주었다. 헌법이 적힌 책자를 손에 들고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들었던 최후의 보루처럼 의지했던 대한민국의 헌법 1조가 문득 떠올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아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크고 작은 정치적 격변 속에 헌법 1조를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사람들 마음속에 나의 주인은 국민이고 권력의 최종 결정자도 국민이라는 의식이 투철하게 박혀 있을 듯하다.


KakaoTalk_20251226_120600415.jpg


이어서 우리는 가장 기대하고 있었던 대법정으로 갔다.

헌재 대법정은 우리가 이미 두 대통령을 탄핵하는 TV 중계를 통해 보았던 곳이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스크린에 비치는 헌법재판소 소장의 모습과 비장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온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동안 나라를 어지럽힌 대통령들이 탄핵되는 역사적 장면이 연출됐다. 우리는 바로 그 판단이 선언되었던 현장에 있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렇듯 민주주의를 향한 다이내믹한 정치적 드라마를 연출한 곳은 없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정치판이 큰 변화 없이 너무 경직된 느낌이 들고, 후진국은 후진국대로 정치판이 너무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요동치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마치 그 두 세계의 중간에서 묘하게 긍정적인 측면만 취하는 듯하다.


대한민국은 과거에는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국의 정치 모형을 답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은 어느 나라의 모델도 따라 하기 어렵게 독특한 선진형 정치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것은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국민의 현명한 판단과 과감하고 직접적인 민주적 참여 질서에 의해 초래된 결과이다.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 국민의 그러한 민주적 행동의 결과를 최종적이고 법적으로 판단해 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그 최종적이고 법적인 주문이 내려진 대법정에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TV 스크린에서 보았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아홉 명이 앉는 밝고 환한 단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무 격자 형태의 무늬를 간직한 천장, 온통 밝은 갈색 나무 책상들,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바닥. 재판관들이 앉는 단상 아래 양쪽에 청구인과 피청구인들이 앉는 좌석들이 있다.


여성 직원은 우리에게 대법정의 의미와 기능에 관해 설명하고 나서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헌법재판소는 헌법 수호와 기본권 보장을 위한 헌법 사건을 다룬다. 탄핵, 위헌법률심판, 권한쟁의 등이 그런 사건에 속한다.


20251022_145440.jpg
20251022_145454.jpg
20251022_145751.jpg



2.


헌법재판소 대법정의 엄숙함을 뒤로 하고 우리는 건물 옥상으로 갔다.

풀과 나무 등이 정갈하게 가꾸어진 옥상은 대도시 속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주변의 높은 빌딩들 너머 서북쪽으로 짙푸른 북악산의 아름다운 전경이 보였다. 탁 트인 시원한 전경이 저절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옥상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주변 경관에 몰입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구름들이 떼 지어 흐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옥상에서 내려다본 헌법재판소 뒷마당에는 범상치 않은 자태의 백송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원래는 본관 내부 관람 일정이었으나 백송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우리는 안내 직원에게 가까이서 볼 수 있을지 청했다. 그녀는 잠시 누군가와 상의하고 돌아오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덕분에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가서 뒷마당으로 갈 수 있었다.


20251022_151121.jpg
20251022_151507.jpg
20251022_151930.jpg


백송은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주기둥이 가위처럼 두 갈래로 벌어진 채 길게 뻗어 있었다. 주기둥이 길게 쭉 뻗어서 쓰러질 듯하여 나무 밑에 기둥 받침대 여러 개가 서 있었다. ‘서울재동백송’이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수령 600년 정도를 헤아린다. 그러니 이 나무는 조선 초부터 현재까지 이 땅을 지키면서 우리 역사와 사회의 변화를 묵묵히 목격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 앞마당에는 박규수 선생 집터, 제중원 터, 이상재 집터를 알리는 비석이 있어서 이곳이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자리였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박규수(1807-1876)는 조선말 근대화를 주장한 우의정이었고, 설립 초에 광혜원으로 불렸던 제중원은 1885년 설립된 서양식 병원이다. 이상재(1850-1927)는 한말 및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구성한 인물이다. 헌법재판소의 터는 이처럼 조선 근대화를 꿈꾸던 이들의 숨결이 머물던 곳이다.


본관에서 나온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역사 자료들이 있는 별관으로 이동했다. 이 별관은 본관이 좁다 하여 2020년에 신설된 건물이며 헌법재판소 관련 정보와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일반 시민은 누구나 관련 자료를 이용하고 도서관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 별관에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역사, 의미, 주요 결정 사례, 재판관 구성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에 법률 체계를 집대성한 경국대전으로부터 1987년 만들어진 현행 헌법의 판본까지 볼 수 있어서 우리나라의 법적 근간을 문서화한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별관 관람까지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오후 햇살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퇴근시간이었는지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동행했던 이들은 인사동 공평유적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재작년에 자세히 보았던 곳이라 나는 그냥 떠나기로 했다.


정독도서관부터 헌법재판소에 이르기까지 꽤 길었으나 보람찬 하루였다. 서울의 깊은 역사와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슴에 품은 채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한 안국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20251022_154605.jpg
20251022_154819.jpg


20251022_154754.jpg
20251022_154840.jpg
20251022_155340.jpg


20251022_155816.jpg
20251022_15593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