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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mory Sep 20. 2023

국경과 이방인

아이디를 가진 존재와 공간의식의 혼탁함

1.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기대되지만 자못 힘든 일이다.

4년여 만에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나의 계획은 드디어 이뤄졌지만, 출발 전에 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내가 없는 동안 비즈니스와 집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한두 주도 아니고 거의 두  달이나 되는 긴 여행이므로 나는 여러 고민에 빠졌다.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나 혼자 하는 여행이므로, 물리적인 여행으로만 따지면 별로 복잡할 것도 없다. 그러나 미국에 남겨진 나의 ‘일’을 방기 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제법 복잡한 사정을 미리 잘 정리해둬야 했다. 결국 그렇게 미리 한다고 해도 불안함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가시지 않겠지만.

삶이 단순하면 얼마나 좋을까.


뭔가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이 주변에 많다면 그것은 모두 인생의 짐이다. 짊어진 짐이 많을수록 머리는 복잡하고 삶은 고단하다. 언젠가부터 나는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꿈꾼다. 나이 들어 복잡하고 고단한 삶의 여정을 가자면 힘들고 지칠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자기 한 몸 간수하는 것도 힘든데, 다른 일까지 떠맡아야 한다면 삶의 무게는 그만큼 더해지는 것이다.


물론 주변의 일과 사람이 내 삶의 버팀목이 되고 보호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지금껏, 또 앞으로도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은 그런 부담 또는 일을 여전히 기꺼이 맡고자 할 것이고 책임지고자 할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내가 맡아야 하는 책임과 부담을 무조건 벗어날 수는 없다. 욕망만으로는 이런 부담과 책임을 떨쳐낼 수 없다.


그렇다 해도 나이가 들면서 미니멀리즘의 매력을 더욱 느낀다.

이미 누군가는 성취한 미니멀리즘.

그들의 삶의 가벼움이 부럽다.


2.


여행 가방.

자주 보는 유튜버 가운데 어떤 미니멀리스트가 있는데, 그의 짐은 놀라울 정도로 매우 단출하다. 40세 가까운 그의 짐은 모두 배낭 하나에 들어간다. 옷 몇 벌에 유튜브 장비 등에 불과하므로. 그의 짐 가운데 아마 가장 비싼 것은 유튜브 촬영 및 편집 장비일 것이다. 그것은 그가 재정적으로 먹고사는 주요 수단이므로.


그가 이곳저곳을 다닐 때 겨우 배낭 하나만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이번 한국여행에서 나도 조금이나마 비슷하게 그를 따라 하고 싶었다. 바퀴 달린 두툼한 플라스틱 가방을 끌고 다니는 것을 피하고 등에 메는 가방으로 결정했다. 사실은 바퀴 달린 네모상자 모양의 가방보다 등에 메는 배낭이 더 유용하다. 들어가는 내용물 양은 큰 차이가 없는데,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를 넣기에는 배낭이 훨씬 좋다. 문제는 메고 가는 배낭의 무게일 뿐이다. 사실 나에게 그것이 약간 버겁기는 하다.


나는 등에 메는 배낭과 손에 들고 다닐 가방을 하나 가지고 가기로 했다. 계단을 오를 때도 나는 가볍게 걸어 올라가고 싶었다. 바퀴 달린 가방을 끙끙대고 계단을 오르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므로.


드디어  한국으로 가는 날, 그렇게 두 개의 가방을 내 몸의 앞뒤로 메니까 진짜 여행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에는 주로 옷과 세면용품을 담은 10킬로그램 정도 되는 배낭을, 가슴에는 노트북컴퓨터 등 귀중품을 담은 4킬로그램 정도의 가방을 메었다. 거의 두 달이나 머물러야 하는 여행 짐치곤 단출한 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많다!) 그리하여 공항에서 체크인을 위해 에어프레미아 항공사 데스크로 갔을 때 화물로 부칠 짐을 묻는 직원에게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따로 부칠 화물이 없나요?"

“이게 답니다.”


한국에서 거의 두 달이나 지낸다는 사람이 그게 전부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데스크 건너편 여성의 얼굴에 나는 근거 없이 자신 있다는 표정의 미소를 지어 보냈다. 나를 따라 같이 미소를 짓는 데스크 직원이 상냥해서 좋다.


기내에 들어간 나는 가볍게 배낭을 의자 위에 있는 스토리지에 올려놓고 작은 가방은 앞좌석 밑에 놓았다. 비로소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홀가분함을 느낀다. 어떤 결전의 날이 아님에도 나는 괜시리 속으로 되뇌인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3.


나이 들어 먼 길 여행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서울과 뉴욕은 약 1만 1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다. 직항을 탄다 해도 비행기 탑승시간만 14시간 반이나 걸린다. 중간에 갈아타고 대기하기라도 하면 시간은 더 늘어난다. 비행기를 갈아타는 것을 매우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긴 여행에서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만약 중간에 한 번 갈아타고 두세 시간 정도 대기하면서 수백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할 수도 있다. 과거에 나는 이미 그런 방식으로 비행기를 탄 적이 있다. 비록 공항 바깥으로 나갈 여유는 없었지만 낯선 공항에서 한두 시간 앉아 있거나 공항 안을 구경하느라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불편하거나 불쾌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여행이라는 것이 낯선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인데, 낯선 공항에서 낯선 사람들과 낯선 분위기를 잠시 접해 보는 것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하면 왜 좋지 않겠는가. 그것은 마치 시간당 백 달러나 받으면서 쉬어 가는 것과 같다. 중간 기착과 대기로 항공료를 절약할 수만 있다면.


하여간 이번 여행에서 나는 원래 직항을 타려고 고집하지는 않았지만, 우연히 그렇게 됐다. 예전에도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으로 직항을 이용하긴 했지만, 일본항공사나 캐나다항공사를 이용하면서 비행기를 한 번 갈아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를테면, 나리타 공항이나 토론토공항이 어떻게 생겼고, 공항 분위기는 어떤지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2개월 전부터 열심히 조사한 결과 한국에 새로 생긴 제3의 국적 항공사라는 ‘에어프레미아’를 선택했다. 작년부터 새로 취항한 항공사다. 이 항공기에 대한 평가가 나쁜 것도 아니라서 조사한 결과, 한 번 갈아타는 것보다 낮거나 비슷한 항공료 플랜을 발견했다. 날짜만 잘 선택하면 같은 직항이라 해도 수백 달러나 차이가 난다. 뉴욕-서울 간 직항 항공료는 대한항공> 아시아나> 에어프레미아 순인데, 날짜에 따라 차이가 크다.


어떤 사람은 항공사의 마일리지를 쌓는다고 해서 굳이 동일한 항공사를 이용하는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다만 저렴한 가격으로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은 ‘마일리지 프로그램’이라는 허울 좋은 광고를 따르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의 주된 목적은 충성스러운 고객을 확보하는 것이다. 마일리지 모아서 비즈니스 좌석으로 업그레이드했다는 사람 이야기는 나처럼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지 않는 사람과는 거리가 있다.


직항으로 좁은 좌석에 앉아서 14시간 반이나 견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자정을 바로 넘은 시간에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서울로 오는 시간 내내 '밤의 지구'를 통과하는 듯했다. 서울로 오는 동안 비행기 창밖은 내내 밤이었다는 말이다. (언젠가는 '낮의 지구'를 택한 적도  있는데 그것이 더 괴로운 일인 듯하다!) 뉴왁(뉴저지에 있는 도시)에서 자정 너머 비행기를 탔으므로 승객들은 타자마자 거의 모두 잠에 취했고, 기내는 계속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조금이라도 한국시간에 내 몸을 맞추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버티기로 했다. 그러나 기내가 사뭇 어두웠으므로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좌석 뒤에 붙은 작은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는 것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나는 기꺼이 천장에 있는 불을 켜고 책을 보기로 했다. 책을 읽기에는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는 노란 불빛이 눈앞에 떨어졌는데, 그런 불빛으로 책을 오랫동안 보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거의 모든 승객이 잠을 자는 듯했고, 나를 빼고는 굳이 불을 켜고 책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을 자지 않는 승객들조차 좌석에 붙은 작은 스크린으로 비디오를 볼 뿐이다. 따라서 굳이 천장 전구를 켜고 있는 나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졸리지도 않은데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보기 싫은 비디오를 볼 수도  없었다. 중간에 제공되는 기내 식사를 두 번이나 하고 한동안 눈을 붙이고 잠도 잤으므로, 내가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사실 몇 시간도 되지 않는다. 나는 [How to read 니체]를 반쯤 읽고 나서 (나머지 반은 뉴욕으로 돌아갈 때를 위해 남겨놓고), 나머지 한두 시간 동안은 자전적 소설을 주로 쓴 페미니스트 작가 비비언 고닉(Vivian Gornick)의 [The End of the Novel of Love]를 읽었다.


니체는 괜찮았지만 고닉를 고른 것은 잘못이었다. 나는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읽고 싶었는데, 나의 영어 문제인지 문학 문제인지, 이 책은 작가가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 도무지 쉽게 파악되지 않았다. (말이 좀 꼬이기는 했지만, 고닉을 비난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녀는 오늘날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글자들 위로 눈동자만 헛헛하게 지나갈 뿐 나의 인식체계 속으로 책의 내용은 차분히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이런 책은 왜 쓰는 걸까. 피곤한 눈으로 성의없이 책을 읽다가 공연히 유명 작가를 불평하면서, 하필 이 책을 가방에 담은 나를 원망했다. 그나마 두껍지 않고 가벼운 책을 고른다는 것이 이런 실수를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한국에 두고 갈 것이다. 누구에게 줄까.


4.


비행기를 탈 때 나는 가능하면  언제나 복도 쪽 좌석을 선택한다. 다른 승객을 불편하게 할 필요 없이 쉽게 일어나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장거리 여행에서 자주 일어나 움직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복도 쪽에 앉으면 두세 시간마다 일어나서 화장실로 가거나 화장실로 가는 척하면서 복도를 돌아다닐 수 있다.


무작정 복도를 돌아다니는 것은 안 될 일이므로, 나는 주로 비행기의 가장 뒤로 향한다. 거기에는 승무원들이 음식 등을 준비하는 방 외에 작은 공간이 있다. 뉴욕에서 서울로 오는 긴 시간 사이에 나는 일부러 두세 시간마다 일어나서 그곳으로 간다. 그곳은 아마도 승객이 비행기 안에서 유일하게 손발을 뻗으면서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장소일 것이다.


사지를 활짝 펴고 스트레칭하는 운동은 이럴 때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하지정맥류나 허리 질병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어나서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다. 물론 중간에 불가피하게 화장실에 가는 일이 생기긴 하겠지만, 출발 전후에 대기하는 시간까지 포함해서 15시간 동안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물론 복도 좌석에 앉으면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또는 창가 쪽에 앉은 사람들에 의해서 의도치 않게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내 어깨를 건드릴 때도 있고, 창가에 앉은 사람이 나갈 때마다 나 역시 일어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나는 그런 게 별로 불편하지 않다.


이번에는 다행히 세 명이 나란히 앉는 좌석 배치에서 중간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내 좌석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창문 쪽 좌석에는 거의 잠만 자는 젊은 한국 여성이 앉았다. 그녀는 총 비행시간 동안 겨우 두 차례 화장실에 간다고 일어났을 뿐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비행시간 내내 잠만 잤다. 비행기에서 그렇게 잠을 잘 자는 것도 부러운 일이긴 하다. 아무튼 나는 그녀가 시끄럽게 떠들거나 자주 일어나서 움직이지 않아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에어프레미아 비행기의 이코노미 좌석은 세 명씩 세열로 구성되어 있다. 가로로 한 줄을 보면, 가운데 세 명, 양 옆에 세 명씩  앉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날 비행기에는 뒤쪽으로 가면서 빈 좌석이 여럿이었다. 내 옆 좌석도 비어서 좋긴 했지만, 어떤 사람은 아예 세 좌석을  혼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은 거기에서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무척 부러웠다. 오래전에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나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이코노미 좌석을 구매했음에도 불구하고 길게 편히 누워서 갈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5.


드디어 비행기가 우중충하게 비가 내리는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창밖은 비가 약간 내리고 있었고 끈적하고 짙은 어둠이 공항에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별 어려움 없이 비행기가 순항한 결과, 도착 시간은 예정보다 조금 빠른 새벽 4시.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거의 모두 자고 있을 것임을 상상했다. 뉴욕에서 이미 보았던 서울의 예상날씨는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한 주 내내 비가 내리거나 흐리다. 알고 보니, 가을장마라고 한다.


가을 장마?


내가 어릴 때는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장마라 하면, 으레 7월 전후에 나타나는 기상 현상 아닌가. 언제부터 가을장마가 있었는지, 혹시 내가 어릴  때도 가을 장마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지 않아도 대기 질이 안 좋아서 거의 매일 하늘이 희뿌연 이 나라에 웬 가을 장마!


도착일부터 지금까지 온종일 맑은 날은 거의 한 번도 없다. 아니, 지난 목요일 오후애만 잠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나타나기는 했다. 그때를 제외하고는 꾸준히 흐리고 자주 비가 내린다. 습도는 매우 높아서 몸에서는 곧잘 땀이 솟아오르고 몸이 끈적거리는 듯하다. 전철을 타고 다니느라 걸어야 할 길은 멀고 많은데,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솟는다. 9월 중순이지만 아직 여름이 끝났다고 말하기 민망할 만한 날씨. 한낮의 기온은 섭씨 28도 정도라,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기후위기라 하더니, 서울의 무덥고 다습한 여름은 무척 길어졌고, 장마나 폭우도 잦아진 듯하다. 봄과 가을이 팍 줄어들어서, 이제는 한 해에  5월과 10월만 좋은 날씨인가 싶다. 겨울에도 봄에도 황사가 심하다고 한다. 희뿌연 하늘이 일상인 이곳에서 나는 아직도 어릴 때 자주 올려보았던, 청색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이 새파란 하늘을 그리곤 한다.


6.


새삼 내가 한국인이 아님을 잘 깨닫게 되는 곳이 있다.

여권 검사 장소.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우르르 내국인들이 나가는 곳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금세 검사소를 빠져나갔다. 외국인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길게 줄을 서 있다. 이번에 나는 무려 한 시간 동안이나 그 긴 줄에 서 있었다. 항상 이렇게 길게 줄을 서고 통과에 오래 걸리는 것인지, 아니면 새벽 4시라서 검사하는 직원이 모자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멍하니 줄에 서 있으려니, 이렇게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복도 어디선가 앉아서 기다렸다가 길게  줄 선 사람들이 먼저 다 나가고 나면  나타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 기다릴 필요 없이 금세 검사하고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답은 아니다,였다.


내가 줄 서고 있는 동안 다른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계속 옴으로써 수백 명이 선 줄의 길이는 별로 변하는 게 없었다. 그러니 혹시라도 줄이 줄어들지 않을까 하고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지 말아야 한다. 결국 한 시간 만에 검사 창구에 들어선 나는 괜히 긴장한 채 여권을 내밀고 디지털 기기로 손가락 지문까지 찍는다.


모든 사람이 국적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국경선을 넘을 때마다 이방인으로 취급받으면서 검사 대상이 되는 것. 그것은 당연하면서도 이상한 일이다. 사람에게 행정적 아이디를 부여하고, 평생 그 아이디를  부착하고 사는 것 말이다.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안전과 편익을 주기는 하겠지만, 서로에게 금을 긋고 불공평한 제한을 주기도 한다.


원래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거주하기 편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자유로웠으며, 마땅히 그래야 할 듯하다. 그러나 사람이 많아지고 권력과 재산이 생기면서, 사람들에게 아이디가 부여되고 소유와 책임과 의무가 부과되었다. 그리고는 금을 그어놓고 서로를 구별하고 제한한다. 하여, 더 이상은 살기 좋은 풍요로운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부착한 것처럼… 너는 그곳에, 나는 이곳에만 있을 수 있다.


내국인과 외국인은 그렇게 서로 다르다.

어쩌면 당신과 이방인도.


오늘날 우리에게 표식은 불가피하다. 신과 자연에게 구별되지 않는 표식이 문명사회에 사는 인간들에게는 문명이란 이유로 존재한다. 거기에서 나는 문화적으로는 한국인이었다가 법적으로는 미국인이었다가 한다. 문득 존재의 혼돈과 공간의식의 혼탁함이 엄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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