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2)
1.
아직 모든 게 천천히 움직였고, 웬만한 거리는 모두 걸어 다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말도 천천히 했고, 생각도 천천히 했고, 걷기도 천천히 했다.
서울에서도 자동차를 가진 집은 거의 없었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아직 높은 아파트도 없었고 빠르게 다니는 지하철도 없었다. 강남 같은 세련된 현대적 도시도 없었고, 퍼스널컴퓨터와 인터넷도 없었다.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많았고 전화가 설치되지 않은 집은 더 많았다. 가정용 에어컨과 냉장고는 이미 개발되었는지 모르지만 아직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다.
아파트와 지하철이 없어도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사람들은 조금 더 부지런하게 서둘러 걷거나 버스나 택시를 타고 다녔으며 한여름에 에어컨이 없어도 상관없었다. 더우면 부채질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선풍기는 시장에 보급되었다 해도 아직 고가제품이었다. 모두 그렇게 살았으니, 무더위와 추위를 견디는 데도 익숙해 있었다. 여름에는 더운 대로 겨울에는 추운 대로 적응하면서 살았다. 사람들은 거의 매일 시장에서 음식 재료를 사다가 조리해서 먹었으므로 음식과 재료를 냉장고에 오랫동안 보관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돈을 크게 벌 수 있는 기회는 매우 제한되었고, 국민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국가는 서서히 공업화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농촌에서 살았지만, 도시는 빠르게 개발되고 확대되는 중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에 기반한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서 도시에는 기업과 공장이 늘어났고 저임금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그로 인해 농촌에서 상경한 젊은이들은 재빨리 공장 노동자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들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수백 년간 농업에만 종사했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도시로 탈출하여 공장 노동을 시작했다. 기껏 도시로 흘러들어왔지만 기업과 공장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은 산업예비군이 되어서 일자리를 기다려야 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도시 빈민이 되었으며 매일 열심히 일을 해도 여전히 먹고살기 어려웠지만 농촌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차가운 대도시의 그늘에서 이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기업과 공장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은 건설 현장이나 시장에 나가서 비정기적 일자리라도 찾아야 했으며, 그런 일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적선을 구하는 거지가 되거나 심지어 도둑이 되기도 했다. 낯선 도시에서 그들을 공짜로 먹여 살려줄 천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정부는 그즈음 농어촌에서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근대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했다. 시골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지만, 농촌계몽운동이 벌어지면서 그런 곳에서도 서서히 전깃불이 밝혀지고 초가집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는 농업이 대세인 국가에서 점차 공업 비중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근대화 또는 산업화라고 일컬어지는 그 과정에서 농어촌 사람들이 대도시로 이주하는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야흐로 산업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농촌 빈민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도시로 물 밀 듯이 몰려왔다. 특히 그중에서도 서울은 인구가 가장 집중되는 지역이었다. 서울은 빠르게 많은 집들을 지었지만, 지방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에 비해 건물과 주택이 충분하지 않았다. 집이 모자랐으므로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전세나 월세를 얻어야 했다. 그것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주거에서 돈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낯선 도시에서 작은 집, 작은 방이라도 구해서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서울에는 한 지붕 세 가족 또는 그 이상으로 모여 사는 집들이 늘어났다. 겨우 일자리를 찾아서 서울 변두리에 몰려든 사람들은 부엌이 없는 방이라도 구해서 들어가야 했다. 셋방조차 구할 수 없을 만큼 돈이 없는 빈민들은 다리 밑에 천막을 치거나 허름한 판잣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
국토는 좁은데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사람들의 수명은 빠르게 늘어났다. 가난한 나라에서 인구 급증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되었다. 신속하게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었던 정부는 반강제적으로 인구급증을 막는 정책을 폈다. 전국민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재교육이 활성화되었다. 정부는 인구가 급증하는 것을 늦추기 위해서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를 내걸면서 전국민적으로 자녀 출산을 제한하려고 했다.
2.
다섯 형제자매 가운데 막내인 나는 대방동에서 태어났다.
대방동에서도 대방시장 안에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시장 입구에서 왼쪽으로 세 번째부터 다섯 번째 가게 뒤에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곳이 내가 태어난 집이다. 그 집 앞에 있는 가게들은 모두 아버지가 세를 준 가게였다. 그 가게 중 하나는 과자 등도 파는 편의점이라서 내가 어릴 때 누나는 나를 업고 다니면서 곧잘 그 가게에서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집에서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은 대방동을 떠나 수년간 왕십리 등 서울 내 다른 곳에서 살기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옮겨간 것에 따른 이사였다. 그러나 내가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우리 집은 다시 대방동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강남중학교 옆 낮은 언덕길로 오르는 동네에 있는 기와집을 샀다. 강남중학교는 여의대방로를 사이에 두고 대방시장 건너편에 있었다. 우리 집은 강남중학교 정문에서 겨우 백여 미터 거리에 있었고 대방교회에서 남쪽으로 네 번째 집이었다. 교회가 있는 그 골목에서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초까지 살았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으니까 1971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 어린 나에게 대림동 삼거리는 꽤 넓은 광장과 같았다. 현재 지명으로 하자면 여의대방로와 신길로가 만나는 지점에 대림 삼거리가 있었고, 그곳에 변두리 극장인 대림극장이 있었다.
어느 초여름 날 오후에 명과 나는 그곳에 있었다. 명은 나와 같은 나이였고 우리 집 맞은편 집에 사는 남자아이였다. 그의 이름은 외자인 '명'이어서 나는 그 애를 보통 "명아"라고 부르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는 "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편하고 이해도 잘 되었다.
우리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명과 내가 그냥 그곳으로 놀러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학교에서 단체로 ‘성웅 이순신’ 정도의 영화를 관람하러 갔을 수도 있다.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 우리는 매년 한 번씩 학교에서 단체로 교육용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성웅 이순신’이라는 영화를 보았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그밖에 ‘6.25 남침’과 관련된 반공 영화 등을 보기도 했다. 이순신 영화는 탁월한 제독이 왜군을 물리치고, 억울한 누명을 써서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또다시 왜군을 물리치다 장렬하게 전사한다는 뻔한 내용이었다. 한국전쟁 영화도 판에 박힌 이야기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별안간 북한군이 탱크를 앞세워 남침했고, 제대로 무장도 갖추지 않은 국군이 오로지 애국심 하나로 적의 탱크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자폭도 하면서 중공군과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낸다는 내용이었다.
대림극장에서 우리 집이 있는 대방시장 앞까지는 겨우 네 정류장, 2.4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한 거리였다. 그 정도 거리라면 걸어가기에 충분했고, 빨리 걸으면 30분 정도 걸렸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30분 정도 부지런히 걸어가면 대림극장이나 신길극장, 또는 대방동에서 여의도로 넘어가는 데 있었던 샛강까지 정도의 거리가 된다. 그 정도가 당시 우리가 가장 멀리 놀러 나가던 범위였다.
집으로 가기 위해 대림극장 앞에서 버스를 타면 되지만, 나는 버스삯을 내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아주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우리 집도 가난했다. 게다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서 언제 올지 모를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차라리 부지런히 간다면 차로 가는 시간 정도에 집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낮이라서 버스는 자주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버스 운행 속도는 매우 느린 편이었다. 나는 집까지 걸어가는 게 낫다고 판단하고 명에게 말했다.
“명아, 버스 타지 말고 걸어가자. 네 정류장이면 걸어갈 수 있잖아.”
“싫어. 다리 아파. 나는 버스 타고 갈래.”
“야아~. 그냥 걸어가자. 버스 요금도 아깝잖아. 이 정도 거리는 걸어가도 되지 않냐?”
나의 애타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명은 굳이 버스를 타고 가겠다고 했다. 속으로 나는, ‘약해 빠진 놈’이라고 욕하면서 걸어갈 준비를 했다. 나는 그때 뜀박질에 자신이 있었다. 돌연히 오기가 나면서 명에게 내기 아닌 내기를 걸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내가 진짜로 뭔가 걸고 내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뛰어갈 테니까 누가 더 빨리 집에 가는지 볼래?”
“그래라. 아무렴 버스가 더 빨리 가지, 니가 더 빠르겠냐.”
“아닐걸. 내가 더 빠를지도 몰라. 그럼 나는 지금부터 뛰어간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뛰기 시작했다. 그때는 사실 버스가 언제 올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하고 빨리 뛰면 될 거라고, 어쩌면 내가 더 빨리 집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버스는 지금과 달리 성능이 낮아서 달리는 속도가 빠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전혀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버스는 정류장마다 서야하고 승객이 내리고 타는 동안 정차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현재 여의대방로는 왕복 7차선이지만 그때는 왕복 4차선 도로였다. 나는 차도를 따라 보도에서 힘차게 달렸다. 지금처럼 차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대낮이라 거리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내가 부지런히 달려서 신대방동에 있는 첫 번째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뒤를 돌아보니, 도로에는 승용차들만 조금 있었을 뿐, 버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고 뛸 수 있었다. 지금은 청주시에 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대방동에 있었던 공군사관학교 앞 정류장을 통과할 무렵 다시 뒤를 보니, 저 멀리서 버스가 천천히 오고 있었다.
집까지는 이제 두 정류장. 나는 이미 절반을 온 셈이었다. 나는 헉헉거리면서 다음 정류장으로 내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듯했다. 세 번째 정류장인 서울공업고등학교 정문 앞 정류장에 내가 도착하기에 앞서 드디어 버스가 나를 앞질러 정류장에 먼저 정차했다. 나는 비록 지쳤지만 버스가 정류장에 서 있는 동안 버스를 스쳐 지나가면서 서울공고 담길 옆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저 버스 안에서 명이가 나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지쳤어도 지금 포기하고 걸어갈 수는 없다고.
내가 서울공고의 높은 담장 옆 보도에서 죽을힘을 다해 뛰고 있을 때 버스는 다시 나를 제치고 추월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우리 동네는 대방시장 건너편에 있는 강남중학교 정문 바로 옆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의 왼쪽 첫 번째 골목에 있었다.
내가 강남중학교 정문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나를 추월했던 버스는 대방시장 맞은편 버스정류장을 막 떠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강남중학교에서 여의대방로를 따라 20여 미터 정도 위에 있었다. 그러니까 그 버스에 탔던 명이 우리 동네로 가려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뒤로 그만큼 돌아와야 했다. 최종 결과는 다행히 무승부로 끝났다. 명과 나는 강남중학교 옆 언덕길 모퉁이에 같이 도착했다.
“와 진짜 빠른데.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왔냐. 나랑 같이 도착했잖아.”
명이 약간 놀란 얼굴이 되어 나를 보고 말했다.
“내가 뭐랬냐. 그냥 뛰어오자고 했잖아.”
언제나 약간 뺀질거리는 명을 보고 웃으면서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대답했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면서. 그러나 전혀 숨차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이것은 내가 당시에 무지 빨리 뛰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버스가 매우 느리게 달렸다는 것을 말한다. 그 당시 버스 성능이 그랬다. 엔진 소리는 무척 요란했지만 느릿느릿했고 더디게 움직였다. 운전사가 수동 기어를 바꿔서 움직일 때마다 버스의 둔중한 몸체가 덜컹거렸다.
나는 그때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우리 반에서 축구선수를 할 만큼 운동을 잘했고 빠른 편이었다. 나의 키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만 크고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므로 성인으로서는 키가 작은 편이지만, 초등학생 때는 매우 큰 편이었다. 그 덕에 어릴 때는 언제나 교실 뒤편에 앉았고, 학생 번호도 늘 뒷번호였다. 학생들은 교실 앞쪽으로부터 키 순서대로 앉았고, 그렇게 앉은 순서대로 학생 번호가 정해졌던 시절이었다.
비록 네 정류장 거리이고 내가 먼저 출발하긴 했지만, 버스와 달리기 경주를 해서 비겼다는 나의 기록은 나 혼자서만 기억하는 자랑스러운 훈장과도 같다. 어릴 때 나는 혼자서 오랫동안 내 가슴에 그 훈장을 새기고 살았다. 살면서 그런 기록은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다. 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일 때 버스와 경주를 해서 이겨야겠다는 생각을 그 누가 하겠냐 이 말이다.
3.
나는 이따금 느리게 움직이는 버스를 보면 그때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된다.
마치 풍차를 향해 공격했던 돈키호테 같은, 어린 시절의 내가 버스를 따라가느라고 열심히 뛰는 환영이 떠오르곤 한다. 그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내가 어릴 때 언제나 걷고 뛰는 것이 삶의 일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버스를 탈 때마다 가능하면 운전기사 옆으로 가서 섰다. 당시 버스에서 운전석의 오른쪽 옆에는 엔진 등 부품들이 있어서 바닥이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표면이 딱딱한 금속이지만 엔진 열기로 인해 늘 따뜻한 그곳에, 특히 추운 날이면 사람들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나 나는 무거운 책가방을 그 자리에 놓고 운전석 옆에 있는 기둥을 붙잡고 서서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모습을 관찰하곤 했다.
거기에 서 있으면 운전기사처럼 버스 전방을 잘 볼 수 있었다. 버스 앞면에 있는 큰 창문을 통해서 보면 마치 내가 차도를 내려보면서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버스 운전을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해도 차를 운전하는 기술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으므로 나는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물론 아무리 운전하는 모습을 본다 해도 실제로 운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였지만, 그가 운전하는 것을 보면 매우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도로에는 차들이 많았으므로 운전기사는 작은 차들이 붐비는 복잡한 도로를 이리저리 헤쳐나가는, 그래서 마치 섬들이 많은 바다를 헤쳐 나가는 배의 선장과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도로에는 수많은 섬들이 있고, 버스는 그 섬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치고 나가는 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때때로 그 섬들이 불을 번쩍이면서 빠르게 다가오기도 하고 끼어들기도 했지만, 노련한 운전기사는 별 문제없다는 듯 잘 피해 다녔다.
버스를 탈 때 운전사를 관찰하는 습관은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기술 과목을 가르쳤던 분이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때 우리는 기술 수업에서 자동차의 구조와 작동원리에 관해 처음으로 배웠다.
얼굴에 여드름이 많고 기름이 잔뜩 흐르는 듯 보이고 언제나 대걸레 자루를 손바닥에 탁탁 치면서 건들거리던 그 젊은 선생은 보통 때는 서글서글하지만 화가 나면 매우 무서웠다. 그는 화가 나면 학생을 엎드려 시켜놓고 그 걸레자루로 학생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그는 걸레자루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바닥을 탁탁 때리거나, 한 손으로 자루를 잡고 다른 손의 손바닥을 탁탁 치곤 했다. 그는 우리들 앞에 서면 거의 언제나 그런 행위를 했으므로, 나는 그의 손바닥이 대단히 딱딱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는 우리 학교로 전입한 이후 아마도 처음으로 우리 반 담임을 맡은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1학년 때는 학교에서 그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으며, 그가 우리 반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러분 담임이다. 앞으로 잘 지내자.”
여느 나이 든 선생님들과 달리, 그는 젊고 패기 있고 호기롭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삼촌 정도로 보이는 젊은 선생님이 나타나서 매우 밝고 빠르고 가볍게 말했으므로 우리 반의 분위기는 저절로 매우 활기찼다.
"너희들이 공부 잘하고 내 말을 잘 들으면 아주 즐거운 한 해가 될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 알았지?"
"네."
한쪽 다리를 다른 다리에 포갠 채 걸레 자루에 비스듬히 몸을 의지하거나 교탁에 기대서 가볍게 건들거리는 선생님의 모습에 우리는 괜스레 신이 나서 일제히 합창하듯 힘차게 대답했다. 그는 마치 우리가 막냇동생이나 조카인 것처럼 다정하고 빠르게 농담을 자주 섞어서 말했으므로 우리는 그가 정말 나이 많은 큰형이나 작은 삼촌 정도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학교에는 이상하게 젊은 교사는 별로 없고 나이 든 교사들만 많아서 어린 우리는 그들에게 상당한 거리감을 느끼곤 했다. 적당한 감정 교류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세대 격차는 우리에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나이가 많은 교사들은 그런 나이 차이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린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나이를 매우 중요시한다. 그 나이 때는 한 살 차이가 매우 크고, 나이에 따라서 할 말과 안 할 말을 가릴 때가 많은 법이다.
3월에 치른 첫 월말 고사 결과가 나왔을 때 우리는 약간 긴장했다. 우리 반이 2학년에서 어느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결과였기 때문이다. 우리 반 평균 점수는 불행하게도 14개 반 중 8등인가 9등으로 나왔다. 그러자 늘 밝은 얼굴이었던 담임선생은 사납게 굳은 얼굴로 변하여 입을 꼭 다물고 우리 앞에 섰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아이들을 노려보다가 비장한 모습으로 걸레자루를 흔들면서 우리에게 책을 덮으라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눈을 감게 하고 일장 훈시를 했다.
말이 훈시지, 내용은 지금부터 우리가 혼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믿었고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서 월말 고사에서도 좋은 결과를 맺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 결과는 자신을 크게 실망시켰다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잊은 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은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깨우쳐주기 위해서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그동안 웃으면서 말로 했는데 그것이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다른 방법을 쓸 필요가 있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 우리는 매우 긴장하여 눈도 깜빡이지 않고 숨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 선생이 결국 우리를 때리겠다는 결의를 조금 길게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서 교사들로부터 맞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우리의 젊은 담임선생은 아직까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가 어떤 수준으로 우리를 때릴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의 젊은 패기를 생각할 때, 또 그가 늘 손에 들고 다니는 걸레자루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저절로 그가 어떻게 우리를 때릴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눈을 감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스러워서 우리는 스스로 오늘 바지 안에 내의를 입고 왔는지 속으로 헤아릴 지경이었다.
3월 내내 순한 양처럼 보였던 젊은 교사는 그날 표독한 미친개처럼 변했다. 그는 우리에게 학생의 본분을 잊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너희 놈들은 혼이 나야 된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자신이 우리를 자기 친동생 대하듯 잘 대해 주었는데 우리가 그를 배반했으며 크게 실망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비교적 낮은 성적을 거둬서 그에게 실망을 주었을 수도 있지만, 도대체 그에게 어떤 배반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그는 놀라운 체력을 발휘하여 언제나 손에 들고 다니던 대걸레 자루로 우리 반 학생 모두를 두들겨 팼다. 지금은 우리가 몇 대나 맞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학생마다 적어도 다섯 대는 맞았음은 확실하다. 그는 언제나 걸레자루를 휘둘렀다 하면 다섯 대는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날 한 사람이 다섯 때씩만 맞았다 해도 학급 인원이 60여 명이었으므로 삼백 대가 넘는다.
말이 쉽지, 나이가 많은 교사라면 팔이 아파서 거의 칠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그렇게 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몽둥이를 삼백 번 이상 휘두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겨우 이십 대 중후반의 이 젊은 교사는 가공할 정도로 괴력을 발휘했다. 그는 우리 모두 그렇게 때리고도 힘이 남은 듯 걸레자루를 여전히 바닥에 탁탁 치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웃을 때 잘해야지, 너희들은 내 기대를 저버렸어. 그러니 이렇게 맞는 게 당연한 거야. 앞으로 내가 다시 웃을 수 있도록 해. 이제 시작이니까.”
이제 시작이니까.
이제 겨우 3월이 끝났으니, 앞으로도 11개월이나 그와 함께 지내야 하는 우리는 이번 학년이 운도 더럽게 없다고 생각했다. 뜨거웠던 몽둥이찜질이 끝난 후, 향후 이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티면서 지내야 할지 암담한 기분에 젖어 있을 때, 그는 우리에게 끝나지 않을 죽음과 같은 숙제를 내주었다.
"앞으로 매일 A4 용지 한 장 앞뒤로 공부한 흔적을 가지고 온다. 알겠나?"
"A4 용지를 앞뒤로요?"
"그래. 앞뒤 양면 빽빽하게."
"얼마나 자주요?"
"매일."
"주말에는 쉬나요?"
"주말에는 공부 안 해?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조금이라도 숙제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눈치를 살폈지만 선생님은 굳은 표정으로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할 때 그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실은 입술이 살짝 열려서 위 이빨이 약간 보일 정도의 잔인한 미소가 그의 얼굴로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동네 양아치들이 어리숙하고 약한 학생들을 삥 뜯으면서 짐짓 너그럽게 짓는 미소와 비슷하다고 나는 얼핏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선생님과 양아치를 비교할 수는 없을 터이고, 다만 그 미소만 그런 느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암담한 숙제를 하기 위해 나는 처음에는 종이에다 몇 글자 적고 수학 문제를 푸는 과정을 잔뜩 적어서 가지고 갔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했다. 그러자 그는 종이에 빈 공간이 많다고, 꾀를 부린다고 또 우리를 걸레자루로 때렸다. 다음날부터 나는 먼저 수학문제를 풀고 나서, 빈 공간에는 주로 영어 단어와 문장을 외우면서 적었다. 그 결과, 종이의 앞뒷면은 연필 글씨들로 거의 모두 새까맣게 변했다.
결국, 우리는 그런 숙제를 매일 했다. 그는 매일 아침 조회 때마다 우리에게 숙제를 제출하도록 했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그는 영락없이 걸레자루로 아이들을 다섯 대씩 때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다시 월말고사가 다가왔을 때 우리는 잔뜩 긴장했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걸레자루의 악몽이 우리를 엄습했다. 그런 긴장의 결과는 놀라웠다. 4월 말 고사에서 우리 반의 평균 점수는 2학년에서 최고로 올라섰다. 그러자 그는 우리 앞에 서더니 말 그대로 입이 귀에 걸릴 만큼 얼굴 가득 환하게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때 그가 밝은 얼굴 표정으로 우리에게 했던 말을 아직도 잘 기억한다.
“역시 너희는 맞아야 해. 맞으니까 점수가 올라가잖아.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면 되는 거지.”
우리 반이 1등을 했다고 해도, 매일 종이 앞뒤로 공부한 흔적을 만드는 것이 멈춰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그 학년 내내 그 숙제를 지속했다. 그로 인해 우리 반은 줄곧 2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고, 2학년이 끝날 무렵 나는 영어 교과서를 보지 않고도 외울 정도가 됐다. 영어 교과서 뒤에 나열된 단어 가운데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수학도 매우 쉽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우리의 성적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에 관해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말하면, 나는 우리 반의 평균 점수가 계속 1등을 유지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것은 그리 자랑할 만한 과정과 결과가 아니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뤄낸 성과를 두고, 그 젊은 선생은 그 후에도 학생들을 계속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그것은 대단히 안타깝고, 어찌 생각하면 분한 일이다.
4.
하여간 그 걸레자루 선생은 우리에게 버스를 타면 여학생만 쳐다보지 말고 운전기사 옆에 서서 그가 어떻게 운전하는 것을 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나는 그 선생의 폭력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아이디어는 매우 좋다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따랐다.
당시에 버스는 수동 기어를 사용했으므로, 운전기사는 하얀 장갑을 끼고 버스 바닥에서 올라온 긴 막대 같은 기어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운전했다. 기어가 바뀔 때마다 거대한 버스는 덜컹거리면서 속도가 달라졌다. 운전기사는 왼손으로는 둥근 핸들을 잡아 돌리면서 오른손으로는 기어를 잡고 흔들었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버스 내부에 있는 승객들을 보기도 하고, 사이드미러를 통해 출입구에 있는 승객들과 안내양을 보기도 했다. 운전기사 바로 옆에 있는 기둥을 잡고 서 있던 나는 그가 그렇게 할 때마다 그를 따라 마음속으로 핸들을 돌리고 기어를 잡아 흔들었으며, 그와 함께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살펴보았다.
비가 내리는 날, 버스 전면의 커다란 유리창에 떨어진 빗방울을 닦느라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이퍼를 바라보는 것, 그 와이퍼가 오래돼서 잘 닦이지 않아 유리창에 부채처럼 둥근 선들로 여러 겹의 자국을 남기는 것, 그리고 그 선들 뒤로 우산을 쓴 사람들이 분주히 거리를 오가는 것, 어쩌면 불편하고 소란스러울지도 모를 바깥 거리와 무관하게 덜덜거리는 엔진 소음이 자장가라도 되는 듯 눈을 감고 조는 승객들,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고래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버스, 그 모든 것은 어린 나에게 매우 진지하고 흥미 있는 일이어서 나는 버스에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우산을 쓴 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비를 피해 바쁘게 걸었고, 도로 위에서 차들은 마치 소리 없는 비디오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때때로 물 웅덩이가 있어도 바퀴가 큰 버스는 아무 문제도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버스 옆에 있는 자동차들은 버스에 비해 키가 매우 낮아 보였고 나는 그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기분 좋게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작은 차들은 버스와 부딪치면 처참하게 박살 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때때로 난폭하게 버스 앞으로 끼어들거나 가로막는 작은 자동차를 향해 나는 속으로 욕을 날렸다.
“비켜, 이 자식아, 어디 그 조그만 엉덩이를 우리 버스 앞에다 들이밀고 있어. 밟으면 확 찌부러질 게.”
이처럼 내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욕을 버스 운전기사는 입 밖에 내지 않고 대체로 잘 참는 편이었지만, 때때로 다른 차가 심하게 끼어들거나 들이댈 때 그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불현듯 쌍욕을 내뱉었다. 운전, 특히 버스 운전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전기사는 여전히 브레이크를 잘 잡으면서 버스 안에 있는 수십 명의 승객을 잘 보호했다. 때때로 졸음에 겨워 문가에 서서도 머리를 끄덕거리기도 했던 버스 안내양을 향해 쌍욕을 날리는 운전기사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 험난하고 피곤했던 환경을 대체로 잘 인내했고 복잡한 거리를 사고 없이 헤집고 다녔다.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그렇게 운전기사의 행동과 전면 창밖을 바라보았으니, 버스를 타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내가 버스 안이나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1970년대 서울 거리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움직일 때마다 거의 언제나 걸어 다니거나 버스를 타고 다녔다. 거리에는 아직 자동차들이 많지 않아서 마음만 먹으면 거의 아무 때나 4차선 차도를 횡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모든 게 느릿느릿 움직이고, 그렇게 해도 큰 문제가 없었던 느긋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가 숨 가쁘게 진행되면서 시골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거리에는 더 많은 사람과 차들이 붐비게 되었고, 사무실과 공장은 밤늦도록 불을 밝혔으며, 대한민국은 점점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시대로 변하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