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언젠가는 이 글을 읽을 당신에게

걷거나 타거나 (1)

by memory 최호인

기억은 섬과 같다.

나는 이미 잊힌, 그리고 지금도 매일 잊히고 있는 섬들을 찾아 헤매는 뱃사람과 같다. 낡은 배를 노 저어 섬을 이어가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나 모든 섬을 갈 수는 없었다. 망망대해 어디에 섬이 있는지, 그 섬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까스로 아직까지 내 머리에 살아남은 기억의 섬들을 찾아 그 섬에 얽힌 사연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뿌연 안개 저편에도 여러 섬이 있겠지만 차마 그곳으로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때도 많았다. 그 섬들을 모두 찾아다닐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 섬들에 얽힌 적당한 사연 또는 다른 섬들과 연결하여 만들어낼 의미있는 추억이 없다면 나에게도 그 섬은 그저 잊혀야 할 무덤과 같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묘비가 사라지거나 묘비에 새겨진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게 되거나 묘가 있던 자리에 잡풀만 무성하여지며 바람과 비로 인해 점점 평평해진 무덤들이 얼마나 많은가. 기억은 그렇게 차차 잊히고 나중에는 묘비명마저 찾을 수 없는 무덤들과 같다.


오래전부터, 너무 늦기 전에,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 섬들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록이 없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섬들은 말 그대로 잊히고 사라지는 무덤과 같을 뿐이다. 누구나 마음과 기억에 수많은 섬들을 가지고 있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그냥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먼지와 같다. 그런 기록마저도 더욱 먼 훗날에는 결국 먼지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허무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내가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의 의미를 살리고자 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와 가까운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을 잊지 못해서다. 긴 생애에서 나는 한 번도 혼자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적이 없다. 나는 홀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과의 관계에서 존재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나의 존재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기억을 더듬어 나는 그들과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또는 무엇이어야 할까에 관해 고민하다가 이런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할 듯했다.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산 것에 관해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그 길고 고단하고 지루한 세월을 살 수 있었을까. 나에게 해를 주고 나를 기만하고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도 지나고 보면 하나의 추억일 뿐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고단한 삶을 치열하게 사느라 허덕이고, 어쩌면 나의 질시와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작용을 보였던 것일 수 있지 않은가.


하물며 나에게 먹고살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 주고 내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가족과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도저히 고마움을 충분히 표시할 방법이 없다. 이렇게 소소하고 형편없는 글로라도 표현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마음에 남은 빚을 해소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나의 가족과 나의 친구들, 그리고 내가 좋아했던 모든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내가 무탈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나의 지식과 나의 의지와 나의 근면으로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의 희생, 내 주변의 배려와 협조, 내 주변의 도움과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내 운명의 강을 지배해 왔던 행운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하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그들 모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여, 언젠가는 이 글을 읽을지도 모를 당신에게 공손히 전하고 싶다.

나의 시간과 나의 행복과 나의 건강을 알게 모르게 지탱해 주었던 당신에게.

진정 고맙고 행복했노라고.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버스를 따라 뛰던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