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거나 타거나 (3)
2. 홍수와 판잣집
1.
동네 골목에서 매일 뛰어놀던 시절, 동네로 들어오는 차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온종일 그 안에서 뛰어노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다.
대방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러니까 아마 다섯 살 무렵의 일이다.
7월 장마로 하늘에 큰 구멍이라도 난 듯 장대 같은 비가 내리던 날, 나는 거실 마루에 앉아서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 기와지붕 아래, 거실 마루 입구 위에는 물결 모양의 플라스틱으로 만든 긴 처마가 이어져 있었는데, 그 처마의 홈을 타고 물이 시원하게 떨어졌다. 물줄기 아래에는 커다란 고무 양동이를 받쳐놓아서 빗물은 그곳으로 모였다가 넘쳐흘렀다.
나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작은 폭포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신기한 풍경이라도 되는 듯 마냥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 물줄기를 맨몸으로 맞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더웠으므로 나는 기꺼이 빗속으로 나가기로 했다. 옷을 적실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옷을 모두 벗고 처마 밑으로 가서 떨어지는 빗물을 온몸으로 맞았다. 머리와 어깨에 떨어지는 빗물이 나의 기분을 매우 좋게 했다.
괜스레 신이 난 나는 용기를 내서 앞마당으로 나갔다. 그리고 살짝 머리를 내밀고 대문 밖을 살폈다. 동네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고 흙길에는 장대 같은 비만 사납게 내렸다. 이 빗속에 아무도 밖으로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맨발로 문밖으로 나가서 대문 앞 도로에서 춤을 추듯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아무도 없는 길에 나 혼자서만 원시로 돌아간 듯 말이다.
그때 내가 미쳤다는 게 아니다.
원래 어린아이들은 가끔 신이 나서 흥분하면 옷을 홀딱 벗고도 남들 앞에서 춤을 추면서 까불기 마련이다. 하필 내가 그때 심하게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그런 심리가 발동했던 모양이다. 내가 말하고자 함은 그러나 그런 아이들의 심리가 아니라, 그때 우리 동네 길거리에 그만큼 사람이나 자동차가 없었고, 길거리가 무섭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흙길 위에 생긴 물길은 비가 그친 후에도 한참 동안 남아 있었다. 그때는 찻길이나 시내 중심가가 아닌 서울 대부분의 마을이 그랬지만, 동네 골목은 흙길이었다. 빗물은 흙길을 흘러가면서 저절로 물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물길이 생기면, 나는 발로 물을 튀기기도 하고, 흙과 돌멩이를 쌓아서 제방을 쌓으면서 놀았다. 그때쯤이면 동네 아이들도 모두 나와서 함께 물놀이를 했다.
“저기에 둑이 터졌다. 빨리 막아.”
우리가 흙과 돌멩이들로 물길에 제방을 만들면 물은 금세 잔뜩 고였다가, 이윽고 제방의 낮거나 약한 부분을 허물고 넘어가든지, 아니면 제방을 우회해서 넘어갔다. 물이 그렇게 넘치면 약한 제방은 금세 허물어지곤 했다. 일단 허물어진 흙 제방은 흐르는 물의 압력으로 인해 다시 복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의 숨 가쁜 노력에도 불구하고 흙은 물에 쓸려 내려갔으며, 우리의 손으로 더 이상 막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물의 위력을 대단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실험 아닌 실험이었다. 그러면 심술궂거나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일부 아이들은 아예 발로 흙 제방 이곳저곳을 짓뭉개면서 허물기도 했다.
비가 많이 오면 우산을 들어도 금세 옷이 젖고 꿉꿉하기 마련이다. 돌아다니기도 어렵다. 그러나 어린 우리는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재미있게 놀 거리를 고안해 낼 수 있었다. 비가 그친 후, 하늘이 맑고 햇빛이 쨍쨍할 때도 여전히 남아 있는 둥그런 물 웅덩이는 흔히 신발과 옷을 더럽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재밋거리가 될 수 있었다. 어린 우리에게 물과 흙과 돌멩이는 늘 충직하고 친근했고 흥미진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들과 같았다.
2.
그러나 장마 시기에는 늘 침수와 홍수가 문제였다.
장마만 되면 물에 잠기는 집들이 많았고, 홍수가 발생하면 한강이나 지류가 곧잘 넘쳐서 물가에 있는 집들이 떠내려가고 수재민이 발생하곤 했다. 비가 많이 내릴 때마다 그런 불상사가 뉴스로 등장했다.
내가 어릴 때 살던 대방동 골목은 다행히 홍수나 침수로 피해를 입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 동네는 언덕 위는 아니지만, 언덕 아래도 아닌 곳에 있어서, 아무리 비가 와도 지붕에서 물이 새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즈음 언젠가 지붕의 기와가 깨진 탓인지 거실 마루에 빗물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곳에 양동이를 받쳐 놓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아버지는 지붕 기와를 수리했으며, 그 후에는 누수가 발생하지 않았다.
원래 주택이 있으면 그렇게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집주인은 으레 그런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사는 게 당연했다. 담이 허물어지면 벽돌을 사 와서 스스로 담을 새로 쌓아야 했고, 마당을 가꾸려면 땅을 파고 다듬고 식물을 심고 키워야 하는 법이다. 김장철이 오면 땅을 깊게 파서 김치를 보관할 독을 묻고 수십 또는 수백 포기나 되는 배추를 사 와서 떠들썩하게 김장을 담가야 했으며, 겨울이면 수백 장의 연탄을 배달받아서 부엌 근처에 쌓아놓아야 했다. 그런 것은 아직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일상이었다.
아무튼 비가 많이 내릴 때 빗물은 언덕 위에 있는 윗동네로부터 흘러내렸지만, 그 빗물은 주로 해군본부 정문 앞 여의대방로 쪽으로 흘러갔다. 우리 동네에 비해 그쪽이 더 낮은 지대였기 때문이다. 빗물이 우리 동네 골목 쪽으로 흘러왔다 해도, 그 물은 완만한 경사를 따라 강남중학교 쪽 도로로 빠져나가서 결국 여의대방로 쪽으로 흘러갔다.
나는 대방동에서 오래 살다가 고등학교 2학년 초에 경기도 광명시에 새로 지어진 양옥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 딱 한 번 침수 피해를 입은 기억이 있다.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로 인해 서울이 점차 포화상태가 되면서 도시 외곽에 많은 집들이 지어졌는데, 우리가 이사 갔던 광명시 지역도 그중 하나다. 영등포에서 구로역을 지나 광명시까지 가서 30번 버스 종점이 있었던 곳이다.
줄곧 기와집에서만 살았던 나는 양옥집에 살게 된 것이 좋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사 간 새집은 그 동네에서도 언덕 아래 가장자리에 있었는데 그곳은 하필 저지대였던 듯하다. 집 앞에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신작로가 있었고, 그 앞에는 거대한 밭이 있었다. 내 기억에 그것은 무밭이었는데, 해마다 5,6월 정도에 농부들이 퇴비를 뿌렸는지 아주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그래서 나는 거실에서 난간으로 나 있는 통창 비슷한 큰 유리문을 비롯해서 집안에 있는 모든 창문을 닫곤 했다.
그러나 거실에서 남쪽으로 난 통창을 통해 바라보면 아무것도 가릴 것 없이 흙냄새 나는 드넓은 밭이 펼쳐졌고, 그 밭이 끝나는 곳에 약간 집들이 있었으며, 그 뒤로 더 멀리에는 관악산이 보였다. 그 산 꼭대기에는 하얗고 동그랗게 생긴 기상청 건물이 아득하게 보였다. 나는 높은 빌딩도 사람도 자동차도 없는, 그 넓은 풍경을 보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그 풍경은 늘 내 눈의 피로를 덜어 주었으며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우리가 새집으로 이사했던 그해 여름, 비가 억수로 내렸던 날, 집 앞 신작로와 넓은 무밭 전체가 나지막이 물에 잠겼다. 바깥뿐 아니라, 집안 마당에도 대문 턱을 넘어서 물이 들어찼다. 물은 이윽고 반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흘러내려갔으며, 연탄보일러 시설만 있었던 반지하실에 허벅지 높이까지 물이 찼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보는 그 광경을 보고 놀랐지만, 실제로는 별 피해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여름이라서 보일러를 작동시키지 않았으므로 그곳에 물이 차도 아무 문제는 없었다. 더욱이 마당에서 여러 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거실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있었으므로, 지하실만 아니라면 침수 피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내가 보았던, 지하실에 고였던 흙탕물은 며칠 후에 내가 학교에 다녀와서 다시 보니 이미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고, 지하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짱했다.
3.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우리 반에 진수라는 아이가 있었다. 과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초여름 날, 나는 우연히 그를 따라 그의 집 앞까지 걸어간 적이 있다. 소풍이었는지 어떤 학교행사였는지 불분명했지만, 학교에서 아이들이 모두 어디론가 단체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나는 진수와 별로 친한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둘이서만 대화를 하면서 그곳으로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진수는 조용한 편이고 활발하지도 않아서, 나는 그가 어떤 아이인지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저기 있는 게 우리 집이야.”
바위가 많은 작은 하천변을 따라 걷고 있다가 진수가 말했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진수는 자기 동네에 이르러 손으로 자기 집을 가리키면서 저기에 산다고 했다. 매우 허름해 보이는 판잣집이었다. 허름한 판자로 얼기설기 엉성하게 만든 집 같아 보였다. 진수는 지난해에 홍수가 나서 자기 집이 떠내려갔지만 다시 지은 집이라고 했다. 그의 집은 한강으로 흘러가는 작은 지류변에 쌓인 돌밭처럼 보이는 곳에 있었다.
나는 문득 작년에 떠내려갔다는 집도 저런 집이었는지, 왜 집이 저런 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새로 만든 집도 또 홍수가 나면 떠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위험하게 집을 저런 데다 지을까.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집이 있는 곳의 지형을 보았을 때 새로 지었다는 집도 다음 홍수 때 또 떠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이런 데 사니? 여기 홍수가 나면 집이 또 떠내려갈 것 같은데.”
어린 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으로 그 친구에게 물었다, 아니, 그에게서 답을 듣기 위해 물었다기보다 얼떨결에 내가 느낀 불안한 마음을 무심코 표현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친구는 나의 호기심이나 우려 섞인 물음에 대해 약간 홍조 띤 얼굴로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나도 몰라. 매년 그래. 그런데 홍수 나서 떠내려가면 또 지으면 되지.”
떠내려가면 또 지으면 되지.
그렇긴 한데, 나는 그 대답이 맞는 말인지 헷갈렸다. 그러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미 집이 여러 번 떠내려갔으며, 떠내려가면 다시 지으면 된다는 그의 집에 대한 초월적 감성과 인식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나아가 그 친구가 겪어야 했을 홍수 피해와 불편함을 나는 어차피 헤아릴 수 없었고, 그 사정을 변경시킬 수도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사정은 나의 일이 아니었므로, 거기에 관해 아주 잠깐 동안만 주의를 기울였을 뿐 실은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진수는 나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나는 그의 동네에 관해 전혀 몰랐으며 그가 실제로 어떻게 사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의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에게 형제자매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마도 나는 그저 거기에, 내가 모르는 어떤 방식으로 사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결국 어떻게든 살아나가니까. 나는 그에게 무심하지만 약간 밝은 말투로 잘 있으라는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후 진수에 대한 기억은 툭하면 떠내려간다는 판잣집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리 내 삶이라 해도, 삶의 일부는 이따금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가고, 나는 그렇게 흐른 시간을 잊은 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 그해 여름 다시 홍수가 발생했을 때 그의 집이 또 쓸려갔을까. 그 집이 쓸려가고 나서 그의 부모님은 또다시 같은 방식으로 판자들을 그러모아서 얼기설기 새로 집을 지었을까. 집이 떠내려갔다면 그의 책들과 그 집의 세간살이는 모두 어떻게 됐을까.
살면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내가 경험한 것이 아니라서, 결국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타인들은 모두 구체적으로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삶에 적응하고 삶을 살아냈다. 나는 내 삶을 살아내기에도 벅찰 때가 많았으므로,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냈는가 의아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남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살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타인의 말을 듣고 그의 고난과 역경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타인과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아니 같이 산다 해도 사실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가능할까.
아무튼 누군가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또 살고 있다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모두 나름대로 그저 그렇게 삶을 버티고 살아냈을 거라는 추측만 겨우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어떻게 사는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뭐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으므로 심드렁하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사는 게 다 거기가 거기지.
이렇게 말할 때 ‘거기’라는 단어가 주는 두루뭉술하고 모호하면서도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어디 있을까. 사는 게 모두 그저 그렇지, 뭐 그리 별다른 게 있나, 하는 말이렷다. 부자이든 빈자이든. 잘 생긴 사람이든 못 생긴 사람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멍청한 사람이든. 인간은 죄다 어차피 먹고 싸고 웃고 우는 게 거기가 거기란 말.
그러나 그 말이 꼭 맞다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도 이따금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곤 하지만, 실은 더 많은 경우에 사람들 사이에 발생한 조그만 차이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힘들어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 조그만 차이들을 매우 크고 중대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 작은 다름들이 삶에서, 또 타인과의 관계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듯 강조하면서 산다. 그런 믿음은 심지어 교육을 통해서도 체계화되고 전염병처럼 전파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그들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국 우리는 모두 똑같이 빈손으로 왔다가 먹고 싸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이거늘.
4.
해마다 물이 넘치는 곳에다 또 집을 짓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분명히 이상한 일이지만, 1970년대에 하천 근처에 판잣집을 짓고 사는 도시 빈민에게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집 떠난 동물이 돌아다니다 적당하다 싶은 곳에 자리를 잡는 것처럼, 정든 고향을 떠난 그들도 고뇌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 터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 테지만,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한번 자리 잡은 터에서 그들이 선뜻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일부러 먼 길을 여행할 때도 있지만, 불행을 피해 길을 잃고 헤매는 동물처럼 그렇게 자주 떠돌아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은 먹고사는 방식이 동물과 달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회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심하게, 매우 극심하게 정해져 있으므로.
나중에 조금 더 커서 생각해 보니, 물가에 지은 그런 판잣집은 아마도 무허가 집이었을 테고, 도시에서 몰락했거나 지방에서 상경한 빈민들이 임시방편으로 머물고자 지었던 집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산업화 과정이 시작되던 그 당시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그들 중 서울에서 자기 돈 주고 집을 사서 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겨우겨우 전세를 얻거나 월세를 얻었으며, 그런 축에도 끼지 못하는 이들은 변두리에 있는 달동네나 어느 굴다리 밑이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길 물가에 허름한 판자를 덧대어 살면서 낯선 타향에서 불안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해건 그다음 해건, 여름에 장마가 지고 또 홍수가 났을 것이다. 그것은 해마다 반복되는 행사였으니까.
텔레비전에서는 한강 물이 한강대교를 넘칠 수도 있을 만큼 불어났다는 뉴스가 나왔다. 화면에는 한강대교 교각에 수위를 표시하는 검은 금들과 함께 커다란 숫자들이 보였고, 다리 높이 가깝게 넘실거리는 강물도 보였다. 지금처럼 한강에 다리가 많지 않았던 때라 다리가 끊어질까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저 다리가 끊어지면 사람들은 어디로 오간단 말인가.
불어난 강물이 한강 다리를 위협하는 광경을 두고, 어떤 이는 그 다리에서 둥둥 떠내려오는 다른 집 세간이나 염소나 돼지 등을 건질 수 있다는 허풍을 늘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다리 위에서 밧줄이나 그물을 던져서 물 위에 머리를 내밀고 떠내려오는 돼지를 건지는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런 일로 강에서 뭔가 건져서 횡재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그때는 박정희 정권이 저 유명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으며, 시골에는 새마을운동과 ‘4H 운동’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인해 시골에서는 무엇보다 누런 초가지붕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으며, 밤마다 희미한 초롱불로 불을 밝히던 곳에 서서히 전기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4H운동이란, Head, Heart, Hand, Health의 약자인데, 이를테면 농촌 근대화운동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운동들은 서울에 사는 우리에게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으므로, 나에게는 전혀 관심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와집에 살고 전기와 수도가 멀쩡하게 잘 들어왔던 나 같은 서울 시민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라고 불렀던 새마을운동 노래를 모두 알고 있던 때였고, 흰쌀 외에 보리나 콩 등을 섞어서 도시락을 가지고 가야 했다.
그야말로 계몽의 시대였다.
국가는 가난하고 국민 대다수는 아직 농민이어서,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그런 계몽운동을 국민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시절이었다. 나아가 개인적으로 전근대적 의식과 문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때였고,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중농주의를 배격하고 중상주의에 역점을 둔 산업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던 때였다. 그래서 서독으로 광부와 간호사를, 베트남으로 젊은 군인들을 ‘수출’하면서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