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흙 위에서 노는 법

걷거나 타거나 (4)

by memory 최호인

1.


시골에서 자란 아이가 부러울 때가 있다.

사대문 밖 변두리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란 나는 시골 생활을 모른다.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나, 생선을 잡고 해산물을 캐는 것이나, 농사철에 맞춰 절기를 이해하고 전통 관습을 지키는 것이나, 동식물과 곤충에 관한 것까지,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은 나처럼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익숙한 법이다. 시골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라면서 분명히 도시의 아이들에 비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데 조금 더 거리가 있고 불편한 게 있었겠지만, 도시 아이들이 누릴 수 없는 장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발표에 앞서 내 글을 읽고,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던 한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옆에 호수 같은 큰 강이 있어서 늘 수영을 할 수 있었다. 겨울에는 물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타거나 썰매를 탔어. 어린 나이에 강둑이 너무 높아서 불안했지만 스릴을 느끼면서 놀았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린 시절 전부를 시골에서 살면서 느끼고 경험하면서 산 것이 인생 최대의 행복인 듯해.”


내 말이 그 말이다.

단독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자란 내가 부러워한다는 것이.


적당한 숲과 냇물이 있어서 여름에는 숲 속을 다니고 물에서 헤엄치고 송사리도 잡고, 겨울에는 썰매도 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골에서 자란 그 친구처럼, 훗날 성인이 되어 서울에서 살게 되었어도, 마음 한 편에는 언제나 어린 시절의 정다운 추억이 한가득 남아 있어서 그것을 잘 기억하고 축복이었다고 여길 수 있다니 부럽다.


2.


그러나 나도 나름대로 흙길에서 놀던 어릴 때의 추억이 없지 않다.

시골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도 어릴 때는 거의 언제나 흙 위에서 놀았다. 시골처럼 논밭이나 바다나 강이나 산이 우리 동네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네 골목은 흙길이었고 동네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학교 운동장과 논과 연못과 야트막한 산도 있었다. 흙은 우리의 친구였고, 우리가 놀 수 있는 무한한 수단과 장소를 제공했으며, 우리의 체력과 창의성을 높여주었다. 흙을 통해 돌과 나무와 눈과 비까지 함께 지낼 수 있었으니,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곧 자연까지 벗 삼을 수 있었다.


동네 골목은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고, 우리는 거기서 여러 가지 놀이를 했다. 거의 매일 바깥에서 뛰어놀았던 우리가 흙이 아니라 아스팔트나 시멘트 위에 있었다면, 그렇게 뛰지도 못하고 많은 놀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과 달리 흙길에서는 오래 걷고 뛰어다녀도 부담이 덜하다. 하다못해 흙을 파거나 쌓고 돌멩이를 찾아서 모아다가 배열하면서 집짓기 같은 것도 할 수 있고, 뾰족한 돌멩이를 찾아서 땅에다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흙으로 된 땅은 놀이를 향한 우리의 상상력과 창조성이 아스팔트나 시멘트나 잔디에 비해 훨씬 잘 드러날 수 있는 장소였다. 우리는 흙 위에서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여러 놀이를 전수받았고, 나아가 우리 멋대로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냈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팔트나 시멘트나 (인공) 잔디 위에서 노는 것보다 흙에서 노는 것이 아이들에게 더 재미있고 창의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흙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앞서 말한 것처럼, 비가 오면 흙길은 물 웅덩이와 물길을 만들어주었다. 물 웅덩이만 있어도 우리는 의도적으로 새 물길을 만들거나 호수를 만드는 놀이를 했다. 손과 발을 흐르는 빗물에 씻거나 담그면서 노는 것은 무척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때는 그 빗물이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고 실제로 그 물이 그렇게 더럽지도 않았다.


비가 그치면 우리는 으레 동네 흙길로 나가서 물길을 손발로 막기도 하고 저수지를 만드는 것처럼 제방을 쌓기도 했다. 흙을 쌓아 만든 둑으로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멩이를 주워 와서 더 높고 튼튼한 둑을 쌓았다. 그러면 더 많은 빗물이 모여서 물은 결국 금세 둑을 넘거나 무너뜨리거나 우회하거나 범람했다. 물길에 종이배나 나무 조각을 띄워 보내는 것도 종종 하던 놀이였다. 물길 위에서 종이배를 놓고 그 배가 물을 따라 흘러가면 아래로 뛰어가서 다시 건지는 것 말이다. 요즘처럼 플라스틱 장난감 배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종이를 접어서 배를 만들어야 했다.


맑은 날에는 흙 위에서 할 게 정말 많다.

구슬 놀이, 딱지치기, 비석치기, 오징어 가이생, 다방구, 달나라별나라, 숨바꼭질, 자 치기, 찜뽕, 묵찌빠, 땅따먹기, 집 뺏기 등 우리는 끊임없이 바꿔가면서 놀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숨바꼭질과 묵찌빠 이외에, 요즘 아이들은 이런 놀이 중 몇 가지를 알거나 할 수 있을까.


구슬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아주 예쁜 유리구슬들이 필요했다. 우리는 문방구에 가서 구슬을 사거나 구슬을 많이 가진 친구로부터 조금 얻었다. 새 유리구슬은 영롱한 색깔과 아름다운 무늬를 가지고 있어서, 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해도 우리의 상상력을 높여주었다. 나는 종종 아름다운 색깔을 가진 구슬이 별과 은하수가 가득한 우주와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구슬을 가지고 ‘삼각형’이라는 놀이나 홀짝 놀이 등을 통해 구슬 내기를 했다. 홀짝은 너무 간단한 놀이라서 설명할 것도 없고 아주 어린애들까지 쉽게 할 수 있었지만, 삼각형은 구슬을 잘 던지는 기술을 필요로 한다. 땅에 그린 삼각형 안에 구슬을 넣어 둔 후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구슬을 던져서 맞히고, 삼각형 밖으로 나간 구슬을 따먹는 놀이다. 그런 놀이를 잘하는 아이는 구슬을 한 광주리씩 가지고 있었다. 이런 내기 놀이에서 구슬이 다 떨어진 아이는 ‘거지’가 되어서, 구슬을 딴 아이로부터 ‘개평’이라는 걸 받곤 한다.


“나 개평 좀만 줘.”


개평이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 잃은 사람을 애처롭게 여겨 상대방으로부터 딴 몫을 조금 나눠주는 것이다. 구슬을 다 잃은 애가 처량한 얼굴이 이렇게 사정하면, 구슬을 다 딴 아이는 위로 차원에서 구슬 몇 개라도 줄 건지 말 건지 결정했다. 그럴 때 개평을 안 주는 애는 거의 없었다. 때로는 그런 말이 나오기 전에 구슬을 다 딴 애가 마음이 약해져서 먼저 조금 내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인정 또는 사정이란 것, 심지어 운에 관해서도 이해했다. 구슬을 따거나 잃으면 "오늘 운이 좋다"거나 "운이 나쁘다"라고 말하곤 한다.


“옛다, 개평이다.”


내기에 져서 모두 잃고 열받은 아이는, 약간 무모하고 무례해 보이지만, 그 개평으로 다시 도전하기도 했다. 내기에 이겼던 애가 그런 시도를 받아준다면, 구슬을 모두 잃었던 아이가 기사회생할 수도 있고 그 개평마저 잃을 수도 있었다. 이때도 마음이 너그러운 아이는 또다시 개평의 개평을 주었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이 놀이는 한도 끝도 없었다.


딱지 치기는 종이를 접어서 해야 하는, 조금 지루하고 단순한 게임이다. 딱지 치기는 바닥에 놓인 상대방 딱지를 내 딱지로 내려쳐서 넘기면 상대방 딱지를 ‘먹는’ 것이다. 딱지를 힘껏 내려치고 기껏 이겨서 딱지를 모아봤자, 사실은 지저분하고 쓸모도 없는 종이를 받은 것에 불과하므로, 때로는 돈을 주고 사는 예쁜 구슬에 비해 가치가 없었다. 딱지는 아무리 많아봤자, 아무도 돈을 주고 사지는 않았으니까.


비석 치기는 더 활발한 놀이다. 손바닥처럼 생긴 돌을 비석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흙 위에 세워놓고 다른 비석을 던져서 맞히는 놀이다. 이 게임은 납작하고 좋은 돌멩이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고, 잘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돌을 던지고 한 발로 뛰는 체력은 기본이다.


다방구나 집 뺏기는 아이들이 두 편으로 갈라져서 경쟁하는 것인데, 잘 달리는 사람이 유리한 놀이다. 순발력과 지도력과 달리기 능력과 지적 능력을 모두 요구하는 놀이이기도 하다. 자 치기는 막대기를 가지고 노는 일종의 골프와 같다. 조금 더 긴 막대기로 ‘자’라고 불렀던 작은 막대기의 한쪽을 내리쳐서 땅에서 들어 올리고, 그것이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공중에서 후려쳐서 멀리 보내는 것이라 순발력과 집중력과 힘을 요구했다.


찜뽕은 야구처럼 베이스를 두고 손으로 고무공을 쳐서 점수를 내는 놀이다. 진짜 야구처럼 배트나 글러브 같이 돈 주고 사야 하는 도구는 필요 없고, 부드러운 고무공 하나만 있으면 된다. 내야 땅볼을 치든 홈런을 치든, 공격수 혼자서 주먹을 쥐고 고무공을 치는 것이므로, 세기나 방향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단, 공격수는 공을 치기 전에 언제나 “하리?”라고 소리쳐야 한다. 선수들에게 공을 치겠다는 신호다.


공격수가 “하리?”라고 물을 때, 수비수가 “마리”라고 대답하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이고, “하리”라고 대답하면 공을 쳐도 된다는 것이다. 수비수가 "마리"라고 했는데도 공을 치고 나가면 '반칙'이다. 찜뽕은 야구와 같이, 공격수가 친 공을 수비수가 공중에서 잡으면 아웃이다. 야구와 다른 점은, 수비수가 공으로 베이스로 달려가는 선수의 몸을 터치해서 아웃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공을 던져서 선수를 맞히면 아웃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수비수가 공을 던져서 달리는 공격수를 맞히는 것은 민첩성과 정확성이 필요하다. 해본 사람은 알지만, 그 게임에서 달리는 상대방을 공을 던져서 맞히는 것은 대단히 통쾌한 일이다.


오징어 가이생은 게임을 이기기 위한 지략과 빠른 달리기와 강한 힘을 모두 겸비해야 하는 놀이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이라는 시리즈가 크게 유행하는 바람에, 이제는 오징어 게임에 관해 아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리가 어릴 때 ‘오징어 가이생’이라고 부른 게임이 그것이다.


‘가이생’이란 일본어로 ‘카이센’이라는 말이며, 그 단어는 대규모 병력이 전투를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오징어 가이생이 딱 그런 놀이다. 땅에다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두 편으로 나눠진 아이들이 재빠른 달리기와 격렬한 몸싸움을 통해 상대방을 따돌리거나 쓰러뜨린 후에 상대방의 본부를 발로 밟으면 이기는 놀이다. 이 게임은 우리에게 순발력과 체력과 지적 능력을 모두 요구했다. 지금까지 말한 게임들 중에 가장 격렬하고 상대방과 직접적으로 몸을 부딪혀가며 싸워야 하는 놀이라서, 여자애들은 하기가 어려웠다. 오징어 가이생에서 오징어 모양은 동네마다 약간 차이가 있게 그리기도 했고, 팔자처럼 만들어서 팔자 가이생이라는 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땅따먹기는 조그맣고 납작한 돌을 흙 위에 놓고 손가락으로 튕겨서 직선으로 금을 긋고 자기 땅을 넓히는 게임이다. 손가락으로 돌멩이를 정교하게 원하는 위치까지 멀리 보낼 수 있어야 하고 전략도 잘 짜야 한다. 돌을 멀리 보내서 땅을 넓게 차지하려는 욕심만 있는 사람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너무 소심하게 돌을 내보내면 지기 십상이다. 땅따먹기는 말 그대로 땅을 더 많이 차지하면 이기는 놀이다.


3.


주로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린애들은 흙이나 돌멩이를 가지고 소꿉놀이를 잘한다. 거의 모두 오빠나 언니, 형이나 누나로부터, 또는 동네 선배들로부터 이런 놀이를 배우게 된다.


소꿉놀이는 가상의 가족을 꾸미고 노는 가장 간단한 역할 놀이다. 소꿉놀이에 참여하는 애들은 서로 엄마와 아빠와 자녀라는 역할을 정하고, 으레 소꿉 반찬과 함께 밥을 먹고 잠도 자야 하므로, 남녀 아이들 사이에 묘한 추억이 남곤 한다.


“너는 엄마고 나는 아빠야. 우리는 부부야. 저녁 먹었으니까 이제 같이 자자.”


아주 어린애들도 이렇게 말하면서 어색해한다. 가부장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전통이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하면서 남녀 간 지위나 역할의 차이를 익히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역할 놀이에서 부부였다는 추억을 오랫동안 공유한다. 나중에 커서도, 그들이 다시 만나면 그때를 떠올리면서, 소꿉놀이 할 때 우리는 부부였어, 하면서 또 어색해지고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소꿉놀이는 아주 어릴 때 하는 것이고, 여자애들은 조금 더 크면 주로 고무줄놀이를 했다. 이 놀이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거의 없으므로 할 말이 없지만, 고무줄 하나만 있으면 여자애들이 고무줄 주변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그 위에서 춤도 추면서 온종일 놀 수 있음은 확실하다. 여자애들은 주로 발을 이용해서 고무줄을 휘감으면서 뛰어놀았다. 내가 보기에는 보통 발재간으로는 할 수 없어 보였다.


남자애들은 보통 고무줄놀이를 하지 않지만, 이따금 여자애들이 노는 곳으로 가서 고무줄을 잡아당기거나 면도칼로 끊고 도망가기도 했다. 그것은 주로 여자애들을 골려주고 싶거나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럴 때는 보통 고무줄 놀이 하는 여자애들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애가 있기 마련이다. 관심이 없으면 굳이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면서 욕먹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자애들은 고무줄놀이를 방해하는 남자애를 향해 야유했고, 그런 남자애는 저절로 비열한 사람이 되었으므로, 여자애들 노는 것을 자꾸 훼방 놓을 수는 없었다. 거기서 놀라운 것은, 고무줄이 그렇게 끊어졌다 해도 다시 이어서 묶으면 되므로 고무줄 끊는 것이 게임을 잠시 중단시켰을 뿐 사실은 별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그런 일로 서로 다투거나 요란법석을 떨었다.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추억을 나누고 정을 쌓는 법이다.


남자애들은 특별히 여자애들이 주로 하는 ‘사까다찌’라는 고무줄놀이에 끼어들기도 한다. 나도 사까다찌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놀이를 학교 친구들이나 동네 아이들과 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교회에서는 가능했다. 그들은 남자가 고무줄놀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런 관습이 조금씩 파괴됐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는 교회의 어린이성가대에 있었는데, 성가대의 여자아이들이 고무줄놀이를 하곤 했다. 금요일 오후에 어린이 성가대 연습이 끝난 후 성가대원들이 교회 마당에서 놀 때 나는 가끔 이 놀이에 참가했다. 이 놀이의 이름은 발음에서 일본어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 일본어로 ‘물구나무서기’라는 말이다. 사까다찌는 양쪽 사람이 잡고 있는 고무줄을 중간에서 손을 대지 않고 넘는 놀이다. 양쪽 술래는 발목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고무줄 높이를 올렸는데, 키가 작거나 다리를 높이 올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먼저 ‘죽었다.’ 고무줄을 넘지 못해서 탈락했다는 말이다.


이 놀이는 일반적으로 다리를 잘 올리는 사람이 유리하지만, 나중에는 주로 키가 큰 애들만 남게 된다. 나는 여자애들에 비해 크기도 했거니와 초등학교 시절에 텀블링이라고 불렀던 공중제비를 잘했으므로, 아이들이 고무줄을 아무리 높게 잡아도 물구나무를 서서 술래들이 팔을 들어 잡고 있는 고무줄 위로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사까다찌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아이가 있다.

어느 날 어린이 성가대 남녀 아이들이 함께 사까다찌를 할 때의 일이다. 나와 같이 6학년에 있었던 여자애가 치마를 입은 채 다리를 높이 들어서 고무줄을 넘을 때 건너편에 서 있었던 나에게 저절로 그녀의 속옷이 보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이성적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다가가서 조용히 말했다.


“너 다리 높이 들어 올리지 마. 그러면 속옷 보여.”

“왜 그런 걸 보고 그래”

그 애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기분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내 팔을 툭 치면서 말했다. 그리고 이내 살짝 웃으면서 “고마워”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애는 나와는 다른 초등학교에 다녔고 성가대에도 나보다 나중에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성격이나 배경에 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매우 똑똑하고 노래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을 많이 봐서 그런지, 어린아이인데도 안경을 끼고 다녔다. 그런데 중학교 들어간 후 얼마 안 되어 그녀는 더 이상 우리 교회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끔 그 애가 생각나서 친구들에게 그 애에 관해 소식을 물었다.


수년 후에 우리 교회 여학생으로부터 그 아이에 관해 들었다. 아마도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였다.

"걔 교통사고로 죽었어."


나는 그녀가 고등학생 교복을 입은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치마를 입은 채 사까다찌하면서 까르르 웃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랬던 그녀가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나는 마치 꿈처럼 생각한다.


4.


내가 위에 언급한 놀이는 거의 모두 반드시 흙에서 해야 한다.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나 인공 잔디에서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게임 성격상 흙의 부드러운 성질과 돌멩이의 딱딱한 성격이 조화롭게 이뤄진 곳에서 해야 하는 놀이는 더욱 그렇다.


흙에서는 넘어져도 덜 다친다. 아이들은 놀다가 으레 넘어지고 구르거나 뒹굴기도 하는데, 흙에서 놀기 때문에 그나마 괜찮은 것이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위에서 그렇게 한다면 크게 다치기 십상이다. 뛰어놀다가 그렇게 많이 넘어졌어도 결정적으로 다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주로 흙에서 놀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놀이를 할 때 매우 중요한 사회적 성격을 나누게 된다.

흙 위에서 했던 대부분의 놀이를 위해서 우리가 어딘가 정해진 곳으로 멀리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 집 앞에 있는 흙길에서 가능한 놀이들이었으며, 거의 모든 놀이 수단을 무료로 얻거나 만들 수 있었다. 고무공, 구슬, 종이 등 인공적인 것이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 해도 흙이든 돌이든 땅에 있는 것을 주워서 이용하면 됐다.


놀이들은 모두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누구나 쉽게 배우고 즐길 수 있었다. 모든 놀이와 지식은 아무 대가 없이 서로 우호적으로 전수되었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었고, 모른다거나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고 무시하거나 따돌리지 않았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 이뤄졌고 표현력이 길러졌으며, 골목대장의 강압적 주장과 같은 예외적 사항만 아니라면 주로 민주적으로 의사가 결정됐다. 아이들 사이에서 무료 거래와 학습은 항상 발생했고, 금전적 상품시장의 논리가 지배하는 거래가 없었으며, 공동체 의식과 협조 정신은 놀면서 저절로 길러졌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게임을 하다가 오늘 내가 져서 ‘죽어도’ 또는 모든 땅을 빼앗겨도, 또는 내가 꼴찌를 해도, 내일은 다시 처음부터 새로 공평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처럼 평등하게 ‘살아서’ 공평하게 놀이 수단을 나눠 가지고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또 누가 놀이 수단을 가지고 와도 함께 공동의식을 가지고 놀 수 있었다. 놀이 수단의 개인적 소유적 성격은 별 의미가 없이 공동체의 놀이 수단으로 쉽게 변했다. 뭔가를 가지고 있어 봤자 혼자서는 재미있게 놀 수 없기 때문이다.


구슬이나 딱지는 그렇지 않지만, 땅따먹기에서 오늘 내 땅을 다 잃어도 내일은 새로 공평하게 땅을 나누어서 시작할 수 있으니, 현실에서 남의 땅을 빼앗고 다시는 주지 않는 것에 비해 얼마나 인간적이고 평등하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다른 놀이들도 그렇다. 놀이 중에 누군가 ‘죽어도’ 그다음에 다시 평등하게 모두 살아나서 다음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새로 게임을 시작할 때마다 죽은 사람이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모두 부활한다. 죽는 사람, 잃는 사람에게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게임을 지면 기분은 약간 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뿐이다. 실제로 내가 잃는 것은 거의 없고 다시 처음부터 게임을 시작할 수 있었다. 머리를 쓰고 체력을 단련하고 협력과 경쟁을 하면서 놀이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발생했지만, 현실에서는 서로 아무것도 잃거나 빼앗는 게 없었다. 그 대신 진정으로 가치 있는 우정을 나누었고 추억이 쌓였다.


흙 위에서 쌓았던 그들의 우정은 종종 성인이 되어서도 죽마고우 관계로 유지된다. 그러한 우정은 성인이 되어서 만나는 사람과는 도저히 쌓을 수 없는 ‘오래된 시간의 관계’다.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의 역사는 매우 중요해서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때 골목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이 일생을 두고 친구가 되었으며, 그중에서는 간혹 첫사랑이 있었고 훗날 연인이나 배우자가 되기도 했다. 어릴 때 골목 흙길 위에서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그런 존재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홍수와 판잣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