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한 하루 한 줄 인문학> 책에 글쓰기에 관해 나와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글쓰기는 나를 견딜 수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 모든 글의 첫 독자는 글을 쓴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속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글쓰기를 중단하고 다시 일상에 빠져 살면 순간적으로는 자유롭다. 하지만 곧 허무해질 것이다. 자유란 '회피하며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멈춘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일'이다. 일상에서 느끼는 영감과 사색의 덩어리들은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정말 빠르게 어딘가로 숨는다. 글은 내 삶과 영감을 붙잡는 최고의 장치다.
정말 운이 좋게도 브런치 작가로 선정되고 나서, 아무에게도 나의 브런치를 소개하지 못했다. 나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발가벗겨진 채로 거리에 던져진 것과 다름 없이 느껴졌다. 늘 나는 괜찮은 척, 강한 척을 하며 산다. 나의 부모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타인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온 나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고통을 참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밖으로 힘들다고 내뱉는 것이 어렵다. 하지만 사실은 힘들다. 혼자 아픈 아이를 케어하며 아이 넷을 키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가 선택한 삶이다. 그렇기에 더욱 입밖으로 힘들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글을 쓰게 되면 힘들다고 쓰게 될 것 같아 글쓰는 일이 망설여졌다. 나의 나약함을 들키게 될 것 같아 두려웠다. 내가 쓰는 글이 너무 하찮아서 비난을 받을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여전히 부끄럽고 두렵지만 브런치는 나의 고통을 배설하는 창구의 역할을 해준다.
이번주는 남편이 목, 금 야근을 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자 아이들을 케어했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각자 등교와 등원을 하고 나면 셋째와 넷째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셋째는 여기저기 사고치기 바쁘다. 정수기 물을 틀어놓아 물바다를 만들고 가스렌지 밑 서랍을 열어 고추장, 올리고당, 설탕 등등 다 꺼내놓기 바쁘고 냉장고 문을 열어 버터, 케찹, 잼 등 꺼낸다. 아기의자를 밟고 올라가 오븐 위에 물건들을 다 내리고, 책꽂이에 책을 다 꺼내며 사인펜 뚜껑을 열어 온 몸에 철갑을 두른다.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물을 참방참방하고 샴푸나 바디워시를 짠다. 유모차를 딛고 올라가 현관문을 연다. 다칠까봐 넷째 수유할 때는 방 안에 들어가 문 쪽에 앉아 수유를 하는데 문을 열겠다고 넷째를 밟을라 치면 아찔하다. 저녁을 준비할 때 넷째가 자주면 수월하게 요리를 할 수 있지만 울때면 한 손으론 6키로가 넘는 아이를 안고 한 손으론 요리를 한다. 셋째가 다칠까봐 아기의자에 앉혀놓으면 이동해서 정수기 옆 공간의 물건들을 다 바닥에 던져놓거나 정수기를 틀어 물바다를 만든다. 저녁 시간에 넷째 수유시간이 겹치면 수유를 하면서 한 손으론 셋째 밥을 먹이고 첫째 둘째아이들 물을 떠주며 잘 먹는지 확인한다. 아둥바둥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감각통합이 잘 되지 않는 아이가 넘어져 혀를 깨물고, 이마가 깨지고 여기저기 멍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부족한 것 같아 속상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는 거라는 걸 알지만 내가 좀 더 빠르게 움직였다면 막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아픈 아이를 더 아프게 하는 것만 같아서 부모 자격이 없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전업주부가 하는 일은 그림자노동이다. 가사일과 육아는 누군가는 꼭 해야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들이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고 엄마가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진다니 엄마들은 가사일도 놓치지 않고 육아도 잘하면서 스스로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집에선 쓸모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에게 돈을 받으며 일을 하지 않는 나는 사회에선 쓸모없는 사람이다. 쉽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힘든 육아와 이러한 생각들로 이번주는 힘들었다. 다음 글은 즐겁고 행복한 내용을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