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을 부수며 - 김경근
사노라면의 붓끝에 시를 묻혀 캘리 한 조각
자네와 나는 전생에
치고받으며
짓고 부수며
공성전을 치렀던
장수였던가 보다
석양이 지면 축 築
여명이 오면 파 破
자네와 나는 그렇게
몇 겁의 생을
가로질러
세로 이어
예서 만났나 보다
영원을 이어가는 자네 삶에 축 祝
나의 생은 여전히 출렁이는 파 波
거미집을 부수며 - 김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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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뀐 화단에 꽃의 낯빛도 달라집니다.
바람결에 감겨올라가는 줄기들도 조금은 단단해져 보입니다.
꽃향기 덕분일까요.
옥상까지 벌들이며 나비들이 날아오는 걸 보면 자연의 향엔 대단한 끌림이 있는듯합니다.
아침에 화단에 물을 주다 보니, 세워놓은 의자와 기둥 사이로 거미집이 예쁘게 지어져 있습니다.
내가 잠든 어느 밤,
달빛을 얹어 씨줄을 뽑고
별빛을 걸쳐 날줄을 이어
부지런히 집을 지었나 봅니다.
거미는 보이지 않지만,
달빛이 저물도록 밤새 바쁘게 오가며 엮어놓은 삶의 그물을 내려다보니, 차마 그 집을 걷어내기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조심스레 의자를 움직이지 않고 건너서 화단 한 바퀴 물을 줍니다.
물을 다 주고 뿌듯한 마음에 의자를 당겨 앉아 아침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십니다.
아뿔싸!
무심코 당기다 보니 의자에 걸린 거미집이 그만 끊어져 버렸습니다.
한편으론 놀래고
한편으론 난감하다가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슬며시 늘어진 거미줄 한쪽을 조심스레 걷어올려 반대쪽 기둥에 걸쳐줍니다.
집은 부쉈지만 일부러 부순건 아니라는 소심한 몸짓의 변명입니다.
거미집을 치워주면서, 어쩌면 전생에 거미와 내가 서로 성을 공격하며 공성전을 벌이던 양측 장수가 아니었나 생각도 해 봅니다.
끝내지 못한 전생의 승부를 이생까지 와서 이어가는 건 아닐지.
달빛 밝은 밤부터
여명 돋는 새벽까지
치고받고 부수고 지키던
치열한 전장에서
쌍검 뽑아 들고 버티고 선
여명 속 어렴풋한 장수의 모습을
억겁의 세월을 지난 이 아침에
이렇게 마주 하는 건 아닌가
상상해봅니다.
오늘 밤은 어느 곳에서 또 저 장수의 축성이 시작될는지, 내일의 여명을 긴장 속에 기다려 봅니다.
화단에 물 주다 말고 거미와의 한 판 공성전을 망상해보는 실없는 아침, 세상 모든 이들의 멋진 상상의 세계를 응원합니다
-사노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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