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 작가의 장편 소설 <부림 지구 벙커 X> 를 읽고.
아슬아슬한 삶의 젠가탑
이미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상태의 젠가탑이 있는 테이블을 툭 치면 어떻게 될까? 위태롭게 평형을 유지하던 젠가탑은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부림지구는 이미 쇠락한 제철 단지다. 거기 모여 사는 사람들은 마치 대도시가 거부한 패잔병처럼 삶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설 <부림지구 벙커X>의 주인공 유진은 부림지구에서 태어나 46년간 부림지구에서 살아 온 여성으로,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재난이 다인 삶을 살고 있었다.
책 속의 재난은 지진으로 시작하지만, 사실 유진에게 닥친 재난은 지진뿐만이 아니었다. 유진의 삶은 이미 시작부터, 혹은 시작 전부터 천천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유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은 왕년의 잘 나가던 제철단지 부림지구의 예견된 쇠락, 가까운 이들의 죽음, 그 죽음과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끈적하게 눌어붙은 가난, 그리고 그 오랜 가난과 지진 후의 거무죽죽한 삶을 만들어 내는데 크게 일조한 정부의 제도와 대책과 방조에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충격을 받았던 몇몇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정선이라는 도시.(‘강원랜드’가 있는 바로 그 도시다.)
3100번 버스를 타고 강남역을 향하다가 본 어떤 이상한 건물. (파출부 용역 인력 사무소, 고시원, 성형외과가 한데 들어 있던 건물이었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서야만 했던 사람들과, 어느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본 마스크 밀수꾼들. (카카오톡 오픈채팅이나 텔레그램 채팅방을 통해 불러내면 그 희귀하다는 마스크를 다발로 들고 나와 밀거래를 시도했다.)
존엄 유지 키트의 아이러니
주인공 유진을 따라가며 목격한 벙커 안팎의 광경을 보면서, 나는 차라리 지진이 났을 때 즉사한 사람들이 그나마 나은 엔딩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정말 삶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버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단 1그램의 존엄도 남아있을 수 없는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상황처럼 느껴졌다. 단적인 예로 벙커에서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뇨 처리 문제 때문에 여러 험담을 끌고 와 서로 다른 벙커 주민들을 욕한다. 그러면서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 간의 온기를 그리워했다. 분뇨 처리 문제를 떠올리며 배가 고픈데도 먹는 것을 잠시 망설인다.
지진 대피소에서는 이재민이 한데 모여 ‘존엄 유지 키트’라는 걸 배급 받는 장면이 나온다. 존엄 유지 키트 안에는 요강, 생리대나 기저귀, 타월 등이 들어 있다. 하지만 지진 대피소에서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로 엉겨붙어 있기 때문에 애초에 ‘존엄’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존엄 유지 키트는 존엄을 유지 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존엄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키트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개 짖는 소리에도 지진을 다시 겪는 것처럼 크게 동요한다. 불안은 바이러스보다 전염성이 강하다.
소설 속 지진 '빅원'과 코로나
코로나 19 사태가 전 세계적으로 터지면서, 나는 사람들이 이제껏 열심히 지켜왔던 일상의 ‘존엄’을 잃어가는 모습을 느낀다. 이게 진짜 현실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이상한 광경들이라, 꼭 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은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공포스러웠다. 약사들은 마스크 있냐는 질문을 받다 지치고, 오늘이 아니라 이 날 오시라고 손님을 안내하느라 잔뜩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언론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문제의 원인으로 탓하고 책임지라며, 정치적으로 이 사태를 이용하지 말라는 둥 어쩌라는 둥 소리를 질러댄다.
우한은 봉쇄되고 거부당했었고, 일본은 이 때다 싶은 것처럼 우리와 교류를 끊고도 동시에 2020 도쿄 올림픽을 개최하겠다며 혈안이다. 유럽이나 미국 같은 여러 나라에선 아시안을 두고 바이러스라고 부르며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풀어놓는 이상한 사람들도 생겼다고 한다. 비교적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게 2020년의 현주소라니! 인간은 대를 이어가며 21세기동안이나 살았지만, 그 동안 무엇이 얼마나 바뀐 걸까? 앞으로 나아가고 있긴 한 걸까? 회의가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읽는 이유
이 소설 속 혜나라는 여자아이는 머리가 약간 어떻게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상황극에 빠져들어 모노드라마 같은 것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 유진은 혜나를 두고 ‘지진을 당한 사람들을 연기하는 이재민 출신의 지진 전문 배우로 성장했다’라고 표현한다. 어쩌면 혜나는 자신이 처한 말도 안되는 이해불가의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소화하기 위해 이재민을 연기하는 모노드라마를 통해 잠시 이 현실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보려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쩌면 우리는 이런 소설을 쓰고 읽음을 통해, 이런 말도 안되는 사건이 자꾸만 일어나는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걸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가장 나은 선택이 뭘까, 어떤 패가 최악이고 어떤 패가 차악일까. 그런 어려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자꾸만 소설같이, 현실을 재구성한 ‘이야기’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라는 인간 정신의 쐐기
필사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모든 생물이 현실에서는 지진 같은 재해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제 일상이 되어버린 미세먼지나 황사, 계절을 헝클어뜨리는 지구온난화가 조금은 생물들에게 관대해졌으면 좋겠다. 혹은 이 재해를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조금은 덜 패배할 수 있도록, 이런 이야기가 흔들리는 우리 정신에 박아넣을 작은 쐐기가 되어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진심 제발…)
유진을 포함한 벙커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다. 재해 초반 대피소에서 ‘존엄 유지 키트’를 받아들었을 때와 극명히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덧이자 TMI) '빅 원'이 처음 일어난 날이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다. 소름! 내 생일이 궁금하신 분이 있다면(?) 이 책을 사서 확인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