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립체 Nov 15. 2020

루이스, 당신 소식을 들었어요.

딸의 결혼식날 당신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루이스, 당신 소식을 듣고 많이 놀랐어요. 난 당신을 잘 알지 못했지만 어떤 이의 이야기를 통해 소식을 들었을 땐 나 역시 당신이 심장병에 걸렸다는 게 거짓이 아닐지, 심장병이긴 해도 그걸 이용한 게 아닌지 의심했으니까요.

당신의 두 남편이 당신의 몇 해 남지 않은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헌신했지만, 그 두 남편은 당신보다 빨리 세상을 떠났고요.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딸은 어릴 때부터 당신이 놀라지 않도록 숨죽여 산 것도 모자라, 자발적으로 그 어리고 젊은 인생의 시간을 당신에게 헌신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고, 그걸 알고 있다고 밝히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일이 끝난 이상 다 알고있다는 사실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요청도 무례하긴 마찬가지인가요?) 사실은 여기에 쓴 것 이상으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고요.

무례하지만 이 이야기를 꺼낸 건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주변의 그 모든 헌신을 바라지 않았는지요?
당신에게 헌신한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이 소식을 내게 전해준 이가 보았던 당신은 정말 당신이었을지요?

알고 있습니다. 이미 심장이 멎고 죽은 당신은 절대 답할 수 없지요.
하지만 당신이 살아있다고 해도 내가 정확한 답을 듣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의 진실이 무수한 질문과 답 사이에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형태로 있을 뿐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회신 없을 편지에 질문을 담아 보냅니다.

평화 속에서 편히 쉬세요.
당신의 이름을 딴 소설의 독자가.


소머셋 몸의 단편 소설 <루이스>를 읽었다.

루이스는 파랗고 커다란 눈에 심장병을 가진 병약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 것은 정말로 평가일 뿐, 그 사람을 진실로 담는 건 아니다. 독자는 루이스를 화자의 시선으로만 본다. 화자는 루이스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 루이스가 자기의 병을 과장해 자기가 원하는 걸 받아내려 한다고 생각한다. 루이스가 "너 좋으라고 내가 죽는 일은 없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낀다'. 실제로 루이스가 그렇게 얘기하진 않았다.


소설의 묘미 중 하나가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서술의 위치에 따라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각이 한정적이어서 우리가 속기도 쉽고 속단하기도 쉬운데, 그게 깨지는 순간을 만날 때의 당황스러움과 깨달음이다.


루이스는 두 명의 잘나고 돈 많은 남편의 헌신을 받는다. 남편은 루이스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몇년 동안만큼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며 자발적으로 헌신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 남편은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첫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이리스도 아픈 엄마를 위해 헌신한다. 화자는 그런 아이리스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주고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둔다.
그런데 아이리스는 갑자기 결혼을 미룬다. 엄마를 차마 버릴 수 없다는 이유다. 화자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어서 루이스를 찾아가 따진다.


네 심장은 왜 너 좋을 땐 문제없다가 네가 싫은 일 하려고 하면 나빠지냐고 따지고, 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는데 앞으로 두 명은 더 떠나보낼 수도 있겠다며 비꼰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팽팽한 언쟁이 쏟아진다. 화자는 루이스가 루이스 주변 인물들을 심장병을 핑계로 맘대로 쥐락펴락하는 게 아니냐고 따진다. 루이스는 화자의 말에 반박하며, 주변 인물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도운 것이지, 자신 역시 아이리스에게 자기 인생을 즐기고 결혼도 하라고 애원했다고 했지만 아이리스가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리스의 결혼식 날, 루이스는
죽는다. 심장마비로.


소설 속에서 독자가 인물에 대해 판단하는 근거는 오로지 묘사된 내용이다. 그 화자가 100퍼센트 객관적이지 않다. 나는 그게 관찰자시점이든 전지적 시점이든 주인공 시점이든 결국 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루이스가 이 화자에게는 오래도록 나쁜 사람이었을 것이고, 아이리스에게는 아픈 손가락이겠다. 두 남편에게는 자신을 꼭 필요로 하는, 그래서 더 그들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느낀 사람이었을 수 있겠다.

루이스의 진짜 의도가 두 남편을 꼬여 이용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원치 않는데도 사람들이 그녀에게 헌신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확실한 건 루이스의 마음과 생각은 루이스만 알고, 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 대 각기 다른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자의 사고도 완전히 기계적인 저울처럼 객관적일수는, 당연히 없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과도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는데, 그게 어느 시점이던 결국 예단이나 속단에 불과하다.


물론 필요한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지킬 때다. 최근에는 디어에서 이런 걸 유행처럼 자주 다룬다는 생각도 종종 한다. 우리가 겪는 그 사람이 혹시 나르시시스트인지 아닌지판별하는 방을 설명하는 책이나 영상 등의 콘텐츠도 많이 보았다. 소시오패스/사이코패스라면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한 퀴즈가 콘텐츠 내에서 흔히 나오기도 한다. 만나야 할 사람과 손절해야 할 사람을 여러 조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콘텐츠도 있다. 더불어 사람과 사람의 감정을 이용하는 섬찟한 범죄가 <.> 같은 르포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누구도 믿고 싶지가 않지긴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것을 꼭 알아둬야 할 생존 수칙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쎄함'을 마주쳤을 때 나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의 착각이던, 남이 보기에 빠른 손절이 무례하건 간에 결국 나를 지켜야 하는 건 니까.


그래도 우리가 속단을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미룰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내가 겪은 이들에 대한 단편적인 판단. 거기엔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 이를테면 연예인이나 그와 관련한 사건에 대한 추측도 포함해서. 두 번째, 나 자신에 대한 것.


첫 번째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한 이름이 떠오른다. 자신을 멋쟁이라 부르던 그 희극인은 왜 세상을 떠나셨을까, 나는 너무 궁금했지만 그 궁금함이 실례라고 느꼈기 때문에 일부러 기사를 찾아보지 않고 관련 영상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했다.

'속단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독야청청 고고하지도 못할 뿐더러 나는 그러기에는 실수도 많고 호기심도 너무 많은 사람이다. 대신 나는 애쓰고 있다. 속단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애쓴다.


두번째, 나 자신에 대한 것. 이건 아직 속단하는 버릇을 다 고치지 못했다. 이를테면 나는 나를 눈치없고, 인간관계에 소질이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열린 결말이다. 가족만이 나에게 닫힌 결말인데, 그래도 완전히 닫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봐야 아는 인간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아주 쪼금만 찍어먹거나 아예 안 먹게 되어버렸다.

그 대신 누가 똥이나 된장을 찍어먹고 퍼먹고 들이붓는 '이야기'를 많이 본다. 실제 인간 관계를 겪기보다 이야기 속에 숨걸 더 편하게 느꼈다. 그러다보니 실제 사람 간의 매커니즘이나 인과관계 같은 걸 잘 파악을 못할 때가 있다. (그런 걸 보통 눈치없다고 표현한다.)


<루이스> 같은 소설이 무서운 점은 여기에 있다. <루이스>는 나를 다시 똥과 된장의 앞에 들이민다. 이제는 네가 먹어볼 때가 됐다, 이렇게 말이다.


박지선님이 떠나기 이틀쯤 전에, 우연히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박지선님이 나온 <유퀴즈> 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영상에서 지선님은 자기는 항상 남들보다 늦 했다.

https://youtu.be/Tsv8jiyiNEA

그때 그 말을 들으며 그게 참 나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렇게 재미있고 재치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에 괜한 용기도 얻었다. 마음속으로 박지선님을 응원도 했다. 사람도 일도 쉬운 게 하나 없다, 내가 참 서툴고 더디고 느리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박지선님은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일찍 떠났다. 그 이유는 당사자 외에는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박지선님이 하신 말에 큰 위안과 용기를 얻었다는 말을 어딘가에든 남기고 싶었다. 당신은 이 말을 볼 수 없겠지만, 나는 당신이 한 그 말을 이렇게 받아들였고, 소중히 기억하고 있다고도 말하고 싶었다.


천천히 가자, 멈추지만 말고.


느려도 되는구나, 느린 게 꼭 나쁜 건 아니구나. 박지선님의 말에 나는 이런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또 다시 이 말을 꺼낸다. 지친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내가 몇 년간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이다. 용기가 나지 않을 때마다 되새겼던 말이다. 어느날 떠오른 말인데, 공교롭게도 공자께서도 비슷한 말남기셨다고 한다.


멈추지 않는 이상 얼마나 천천히 가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공자 말씀 하나 제대로 안 읽고, 스스로 떠올린 내 생각이 공자가 남긴 글과 까마득한 시간을 넘어 찌찌뽕을 한 거다. 내가 공자만큼 대단하단 얘기가 아니다. 몇천 년 전이든, 몇천 년 후이든 인생에 대해 비슷한 말을 남긴다는 것은 그 말이 어느 정도 맞거나, 그도 아니면 최소한 도움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서다. 그 말을 조금 더 새기게 됐다.


똑바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다. 똑바로 살면서 동시에 나를 지키며 사는 일도 쉽지 않다. 그런 때 어떤 '이야기'는 나를 당황 속에 몰아넣는다. <루이스>도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가 외면하던 문제의 바로 앞으로 나를 밀어다 놓는다.

다른 이에 대해서도 속단하지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쉽게 속단한다. 한계를 정하고 주눅이 든다. 한 걸음 내딛는 대신 웅크리고 숨는다. 오늘의 장황한 이 글의 마지막이 결국 다짐이 되었다. 나는 다짐이 많이 필요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게 나쁘다고 속단하지는 않기로 했다. 열 번 다짐하고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면 계속해서 힘을 내는 것도 아깝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책으로 사람이 180도 바뀌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