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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Jan 27. 2023

고토열도 일주기 - 일본의 기독교 성지 답사기 (10)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과 하마와키교회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  (カトリック 牢屋の窄 殉 記念聖堂)

 

타노우라에서 승차한 택시는 오늘 하루를 대절한 것이라 여유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대중 교통이 없는 섬이니 방문객은 택시 말고는 이동 수단이 없습니다. 후쿠에로 돌아가기 위해 타노우라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길, 기사는 카톨릭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カトリック牢屋の窄 殉教記念聖堂은 방문하지 않느냐고 물어 봅니다. 사실 그 성당은 알지 못하고 왔는데 히사가시마 성지 답사의 필수 코스라고 해서 들려 보았습니다. 

기독교 탄압이 여전하던 메이지시대 초기 고토열도에서도 심한 박해가 행해졌 습니다. 잠복중 발각되어 고문을 당한 여느 키리시탄과는 달리 히사가시마의 잠복 키리시탄들은 살벌한 금교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키리시탄임을 숨기지 않아 순순히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이들 교인 200명을 6평의 감옥(로우야牢屋)에 투옥하여 8개월 동안 가두고 매일 가혹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얼마나 심한 고문이었는지 무려 5분의 1에 해당하는 39명이 옥중에서 사망했고 출옥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도 3명이나 되었습니다. 1873년 기독교 금교정책이 해제되자 키리시탄 주민들이 합심하여 이 일대를 성역화하고 순교의 고귀함을 기억하고자 순교기념교회를 지었고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사전에 미처 로우야노사코를 알지 못해 당초 일정에 방문 계획이 없었는데 성지 답사라는 히사가시마 방문 목적을 알게 된 기사가 알려주고 안내해 준 것입니다.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 왼쪽 네모칸이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 오른쪽이 큐쿄린교회입니다.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나온뒤 도로를 따라 타노우라 선착장 방면으로 가는 길에 위치합니다. 

기념성당 정문에 있는 석탑石塔. 동판銅版에 ‘순교殉敎의 땅’, ‘좁은 감옥’이라 씌여진 입구 표지석이 있습니다. 고문과 순교가 연상되어 자못 숙연해집니다. 

바다가 보이는 산 가슭에 위치한 로우야노사코 순교기념성당.

교회에서 바라본 정면 풍경입니다. 언덕에 위치하여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합니다. 안내판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안내원이 되어 준 택시 기사입니다. 그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로우야노사코를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예전 감옥 바로 그 자리에 순교를 기리고 기념하기 위해 1969년 기념교회를 지었습니다. 이후 점차 노후되어 철거하고 1985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릅니다. 철거하지 않고 보존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내에 있는 ‘신앙의 탑’ 입니다.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 히사가시마 키리시탄의 신앙을 기리는 의미로 세운 탑입니다. 메이지 원년인 1868년 히사가시마에 박해의 광풍이 불었습니다. 역사에 ‘고토 박해’라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이곳 키리시탄은 숨지 않고 스스로 키리시탄임을 공개해 고문과 처벌을 자초했습니다. 다다미 12장 크기의 감옥에 200여명을 감금하고 고문했다고 합니다. 다다미 한장의 크기가 90㎝X180㎝니 12장이면 20㎡도 되지 않는 비좁은 공간입니다

위는 ‘히사가시마 카톨릭 신도 감옥의 터’의 이름으로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사진이고, 아래는 터의 표지석입니다. 위령비에는 요한복음 12장24절 말씀 ‘하나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가 새겨져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이 바로 이곳에서 순교한 키리시탄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포된 키리시탄이 갇혔던 감옥은 크기 1.6㎡의 다다미 한 장의 공간에 17명이 있어야 하는 넓이로, 눕기는커녕 제대로 앉을 수도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루 한끼 부실한 식사로 연명했고 배변도 이루어졌습니다. 감금된 상태 자체가 고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마와키교회 (浜脇敎會)

 

택시기사는 이어 하마와키교회浜脇敎會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하마와키교회 역시 당초 일정에는 방문 계획이 없던 곳입니다. 성지 답사 왔다면 꼭 방문해 봐야 하는 교회라는 기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타노우라로 가는 길에 있습니다. 하마와키교회에서 타노우라 선착장까지는 걸을 수 있는 짧은 거리라 택시를 보내고 교회를 살펴보았습니다. 

1873년 금교 정책이 폐지되며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키리시탄 주민들이 1881년 목조 건물로 지은 ‘쿄린교회’를 기원으로 합니다. 심한 해풍과 잦은 태풍 으로 건물이 노후된데다 출석 교인이 계속 증가하여 큰 교회당 신축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옛 목조 건물 교회를 쿄린 지역으로 옮기고 하마와키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건축했습니다. 옮겨진 목조 교회가 현재의 큐쿄린교회고, 새로 지은 교회당이 지금의 하마와키교회입니다. 1931년 해풍에 강한 튼튼한 철근 콘 크리트로 건축하여 고토열도 최초의 콘크리트 교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데다 후쿠에향 여객선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하마 와키교회 예배당에서 차분히 읹아 기다리며 이 낙도에서 행해진 키리시탄의 고난을 다시 되새겨 보았습니다. 

히사가시마의 키리시탄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죄가 아니었고, 오히려 축복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며 감사해했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키리시탄임을 밝힐 수 있었고 모진 고문과 순교를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1789년에서 1801년까지 오무라번에서 많은 키리시탄이 이주하여 고토열도의 작은 섬에 분산되어 신앙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1865년 나가사키 오우라교회에서 있었던 신도발견 사건 소식이 고토열도에 전해졌습니다. 서양 선교사를 간절히 만나고 싶어하던 신자들은 나가사키까지 가서 프띠장신부를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져 키리시탄임을 숨기지 않았고 이는 로우야노사코 순교사건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신자들은 1881년 현재의 큐쿄린교회를 건축했고, 1931년 기존 큐쿄린교회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이 하마와키교회를 건축했습니다. 

※ 원래의 하마와키교회 → 장소 이전하여 지금의 큐쿄린교회, 지금의 하마와키교회는 원래 큐쿄린교회가 있었던 하마와키 지역에 신축. 

교회는 깔끔하고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견학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예배당 문은 개방되어 있고, 교회 관계자들도 미소로 인사를 건넵니다. 기존 교회의 노후화와 신자수 증가에 따라 교회를 새로 지었지만 정작 현대에 들어서는 섬의 인구 감소와 함께 출석 교인수는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지금도 매주일 예배가 행해지고 있지만 섬 전체 인구가 300명에 불과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완공 이래 몇차례 개보수를 거쳤지만 1931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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