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는 알고 가자, 일본! (1) - 에도시대의 참근교대 제도
유력 다이묘大名간 하극상이 난무하던 약 100년간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최후의 승자가 되어 에도시대江戸時代 를 열었습니다. 그는 인내력과 기다림의 쇼군將軍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어려서부터 시작된 길고 긴 불모 생활에 기인합니다.
하극상으로 정권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역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반란으로 삶을 마감하고, 배신자 아케치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오다의 복수를 마무리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장악합니다. 결국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혼란했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시키고 전국全國을 통일한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늦게 얻은 어린 아들 히데요리 豊臣秀頼가 명분상의 정권을 이어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보아 온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내실있게 자신의 세력을 키워 놓았습니다.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토요토미의 측근들이 대거 임진왜란에 출전한데 반해 도쿠가와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에도江戸(지금의 도쿄東京. 교토京를 기준으로 동쪽東에 있다하여 도쿄東京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에 머무르며 자신의 병력을 착실하게 양성시켜 놓은 것입니다.
히데요시가 죽자 정권의 정통성은 도요토미가家에 있다며 유력 다이묘들이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서군西軍을 형성합니다. 결국 천하 제패를 꿈꾼 도쿠가와와의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역사에 전국시대 마지막 전쟁으로 기록된 세키가하라전투関ヶ原の戦い입니다. 이 전쟁 역시 따지고 보면 도쿠가와의 하극상 전쟁입니다. 전쟁은 도쿠가와군인 동군東軍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천황을 교토京都에 유배시키듯 두고 자신은 에도에 막부幕府를 설치하며 에도시대를 엽니다. 에도시대의 정치 시스템을 막번幕藩체제라 부르는데 막幕은 막부, 즉 중앙정부가 되고, 번藩은 오늘날의 현県에 해당 하는 지방 정부가 됩니다.
하극상으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자신 역시 하극상으로 정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으로 지방의 영주가 세력을 키우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지방의 영주領主를 다이묘大名라고 부르는데 영주는 지방 행정단위 번蕃의 주인이란 의미로 번주蕃主라고 불렀습니다. 번주는 자신의 영지領地에서 왕과도 같은 존재로 쇼군에게 충성만 맹세하면 완벽에 가까운 자치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충성 맹세는 막부가 전쟁에 참전하면 무조건 막부편에 서서 싸우는 것으로 증명했습니다. (우리나라 골프장에서 앞뒤 아무도 없이 오직 자신들만 여유있게 치는 골프를 ‘대통령 골프’라고 부른다면 일본에서는 ‘다이묘 골프’라고 합니다.) 강력한 중앙정부를 구축했으나 도쿠가와에게 히데요리의 잔당들이 있는 서쪽의 번주들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결국 번주들의 힘을 빼기 위해 참근교대参勤交代라는 제도를 실시합니다.
참근교대는 에도막부의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 때 정식 제도화 되었습니다. 다이묘의 가족을 에도에 상주시키고 다이묘 자신은 1년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은 에도에서 교대로 생활해야만 하는 제도였습니다. 가족은 실질적 볼모였고, 다이묘는 1년 건너 자신의 영지로 돌아오니 자체 군사력을 기를 여력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참근교대에 소요되는 모든 비용은 번주가 부담해야 해서 반란을 일으킬만한 충분한 부를 축적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번주의 이동이다 보니 대규모의 인원이 동원됐습니다. 가신은 물론 가신의 가족들도 대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번주를 보필하는 사무라이들과 하인도 많아 그 규모는 통상 500명, 많으면 1,000명을 헤아렸다고도 합니다. 에도에는 각 번에서 조성한 자체 주거지가 있어 마치 외국에 설치한 대사관과도 같았습니다. 에도에 상주해 있는 동안 번주는 그곳에서 생활했습니다. 1년 주기로 이런 이동을 하다보니 도쿠가와의 의도대로 번주들은 자신의 영지에서 막부를 위협할만한 큰 힘을 기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의 잦은 이동은 일본 산업 곳곳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단 이동을 하기 위한 도로 확장과 신설로 교통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대규모의 인원이 이동하며 먹고 자려니 숙박업과 식당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지역 상업 시설과 주민, 번주 일행에 물자를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조업과 유통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대금 지불과 회수를 위한 금융 시스템도 발전하여 근대 사회로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설이 밀집된 장소는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모든 비용을 번에서 부담하니 부의 분배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특히 상공업이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에도 역시 이들로 인해 경제가 크게 발전하고, 인구도 증가하여 에도시대 말기 에도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한편 이 제도의 파생적 영향으로 유흥업도 발전하게 됩니다.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거나 결혼을 하지 않은 독신 가신과 사무라이들이 유흥업 성업의 주역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신으로 외롭게 생활하다 보니 즐길거리를 찾게 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공연장과 찻집과 술집, 그리고 식당이 늘어났습니다. 에도 건설을 위해 유입된 노무자들을 위해 생겨난 유곽은 참근교대로 에도로 온 지방의 사무라이들까지 가세해 더욱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각종 유흥 시설이 들어서고 상점, 극장까지 생겨나며 종류도 다양해지고 그 수준도 등급이 매겨지며 올라갑니다. 일본 최대의 유곽 요시와라吉原의 태동 배경이기도 합니다.
참근교대 행렬 (출처 mainichi.jp )
참근교대 행렬 (출처 nippo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