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는 알고 가자, 일본! (2) - 서양인 사무라이
외국인으로 일본 최초의 서양인 사무라이가 된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은 영국인으로 본명은 윌리엄 아담스William Adams입니다. 1564년 영국 켈트에서 태어나 열두살 되던 해 선원이었던 아버지를 여의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12년간 도제식으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웠습니다. 이후 해군에 입대하여 영국과 스페인의 해전에도 참전하여 실전 경험을 쌓기도 했습니다.
첫번째 부인 메리 힌과 결혼하여 이미 두 자녀가 있던 아담스는 1598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동생과 함께 다섯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네덜란드의 극동지역 항해단에 승선했습니다. 선단의 영국인으로는 그와 그의 동생뿐이었고 임무는 항해사였습니다. 다섯척으로 출발한 선단은 스페인에 두척이 나포, 한척은 회항, 다른 한척은 침몰하여 결국 아담스가 승선한 선박 단 한척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담스가 탄 배는 기나 긴 항해 끝에 1600년 일본 큐슈九州의 오이타현大分県에 상륙했습니다. 서른일곱의 나이로 영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땅을 밟은 것 이었습니다. 동생은 항해 도중 정박한 기항지에서 사망합니다.
학교에서의 정규 교육은 부족했지만 오랜 도제 생활과 다양한 경험으로 여러 방면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아담스는 지방 정부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하여 호감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급기야 최고의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직접 심문을 받게 되고 역시 뛰어난 화술로 다시 한번 호감을 얻습니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도쿠가와가 서양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담스가 타고 온 선박에 있던 다량의 서양 무기와 물품들은 도쿠가와의 수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담스에게 호감을 갖게 된 도쿠가와는 안진按針이란 일본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안진이란 나침반羅針盤을 따라가는 도선사導船士나 수로水路 안내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선원 출신인 아담스에게 매우 어울리는 이름이었습니다.
1549년 스페인 출신 신부 프란치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의 가고시마鹿児島 상륙으로 시작된 일본의 카톨릭교는 이미 많은 교인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구교국인 포루투갈과 스페인은 로마 카톨릭에서 탈퇴한 영국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포루투갈과 스페인에서 온 선교사들은 정부(막부)에게 아담스를 해적으로 몰며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아담스는 이번에도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의 분리 배경 과 유래, 대립 원인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여 오히려 도쿠가와의 신뢰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독교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탄압 정책을 펴고 있던 도쿠가와였습니다. 이어 도쿠가와는 계속 아담 로부터 유럽 사정과 세계 지리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고 결국에는 아담스를 정식 외교 고문관으로 임명합니다.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의 실권은 이미 도쿠가와에게 넘어가 있던 상태로, 도쿠가와는 1603년 에도江戸에 정부인 막부幕府 를 설치하고 에도시대江戸時代를 열었습니다. 에도는 오늘날의 도쿄東京입니다. 정식 관리가 된 아담스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습니다. 도쿠가와로부터 명 받은 대형 선박 두척을 완벽하게 건조해 내어 도쿠가와를 매료시켰습니다. 오랜 기간 조선술造船術과 항해술航海術을 배웠고 해전에도 참가했던 다양한 경험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가 만든 80톤, 120톤의 두 선박은 일본에서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당대 최대의 선박이었습니다. 선박은 지금의 시즈오카현静岡県 이토시伊東市 지역에서 건조되었는데 지금도 이토시에서는 매년 미우라 안진을 주제로 한 축제 안진사이按針祭가 열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정부의 관리들에게 그의 전공인 조선술과 항해술을 비롯, 수학과 과학 기술을 교육시켰습니다. 정부가 유럽 국가들과 교섭할 때도 참석하여 성공시킨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막부에게 보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점차 아담스의 역량은 무역에까지 확대되어 히라도平戸의 영국 상관 개설까지 관여합니다.
아담스는 막부의 정식 관리가 되었지만 일본에 영구 정착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의 귀국 허락을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재능과 능력, 역할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막부는 그를 아예 정식 사무라이, 그것도 쇼군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계급인 하타모토旗本로 임명하고 귀화를 종용했습니다. 에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요코스카시横須賀市 헤미逸見지역에 영지領地를 수여하고 사무라이의 상징인 두 자루의 검을 하사했습니다. 결국 아담스는 일본인, 나아가 사무라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두 자루의 검을 받아 사무라이의 상징으로 허리에 차고 다녔습니다. 일본인 여성을 두번째 아내로 맞아 아들과 딸을 얻으며 정착했습니다. 이후에는 쇼군 보좌와 무역을 중심으로 계속 활동하다가 1620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큐슈 최서단인 항구 도시 히라도는 안진에게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 입니다. 히라도는 일본 최초의 해외 무역항으로, 안진은 무역 업무 관련하여 히라도를 자주 방문했으며 때로는 장기간 체류하기도 하다가 결국 정착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해외 무역 상관인 네덜란드 상관이 히라도에 설치됐는데 안진은 그곳의 유럽인들과도 교류했습니다. 안진은 에도나 이토가 아닌 히라도에서 사망합니다. 히라도는 개항지로 널리 알려진 나가사키보다 더 일찍 개항한 곳으로,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이 나가사키로 이전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 중심지로 교역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히라도에는 그의 동상과 함께 즐겨 걸었다는 길에 기념 동판이 새겨져 있습니다.
한편 미우라 안진의 이야기는 1980년 많은 화제속에 개봉된 리처드 체임벌린 주연의 영화 ‘쇼군shogun’과 2004년 개봉된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의 모티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