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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Jan 30. 2024

지도 한 장으로 참시까지 - 지볼트사건

이 정도는 알고 가자, 일본 (9)

지난주 70대 한국인 사업가가 중국 선양瀋陽공항에 억류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해 온 이 사업가는 그간 중국 입출국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터라 갑작스런 억류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원인은 2024년 업무용 다이어리에 붙어 있는 작은 지도 한 장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에는 타이완台灣을 다른 나라 국명과 동일한 표기법으로 별도 국가처럼 굵은 글씨체로, 수도 타이페이台北를 역시 다른 나라 수도 표기법와 동일하게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입국을 보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몇시간이나 곤욕을 치르고난 후 해당 지도는 찢겨져 압수당하고 출국시 찾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풀려 나왔다고 합니다. 이 기사를 접하고 지도 한 장 때문에 참시까지 이루어진 ‘지볼트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필립 프란츠 발타사르 폰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1796∼1866는 독일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입니다. 서양인으로 일본에 서양의학을 소개하고 의술을 펼치며 교육까지 시킨 일본 의료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독일의 의학자 집안에서 출생하여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동양에 관심이 많아 당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 육군 군의관으로 파견되어 있다가 1823년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들어옵니다. 에도시대 유일한 유럽 창구인 데지마出島에 거주하며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독일인이었지만 당시 일본과 우호적 관계에 있던 네덜란드의 후광을 얻고자 네덜란드인으로 위장하였습니다.


뛰어난 의술을 인정받아 데지마 영외지역 활동을 허락받고 나루타키쥬쿠鳴瀧塾라는 의학교醫學校까지 세우고 후진을 양성했습니다. 그가 양성한 서양의학 의사는 50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일본인 여성 쿠스모토 타키楠本瀧로 부터 딸을 하나 얻는데 그녀가 일본 최초의 부인과 의사로 기록된 쿠스모토 이네楠本イネ입니다. 최초의 여성 서양의학 의사이기도 합니다.


데지마를 근거지로 하였지만 외부 활동을 허락받아 수도 에도江戶까지 여행하고 의술을 베푸는 한편 일본의 자연, 식물, 동물에 대한 수집과 연구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특히 1826년에는 에도막부江戸幕府의 쇼군將軍을 만나기까지 합니다. 1829년 추방될 때까지 약 6년간 머무르며 일본의 동식물에 관해 연구했고 네덜란드로 귀국해서 수집품을 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연구 실적은 일본의 동식물에 대한 저서로 집필하였습니다. 

추방 당하고 30년이 흐른 1859년 다시 나가사키를 방문하여 또 3년을 머물면서 연구를 재개했습니다. 이후 독일로 돌아와 1866년 70세의 나이로 영면합니다. 추방 당한 이력은 있지만 서양의학을 소개하여 일본의학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나가사키에 ‘지볼트 기념관’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몇년전 방문해 본 적이 있는데 외관은 오래된 서양식 저택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부 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럼 문제가 된 ‘지볼트 사건’이란 무엇일까요.. 에도시대의 일본은 강력한 쇄국鎖國정책을 취하여 일본에 관한 정보의 외부 유출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온지 5년만인 1828년 지볼트는 일시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준비한 귀국 물품에는 당연히 일본 물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중에는 극비 자료도 있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관리 한명이 지볼트의 귀국 소식을 듣고 선물 차원으로 일본 지도를 하나 주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지도는 극비에 해당할 정도의 고급 정보였는데 관리였던 이 일본인이 지볼트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습니다. 적에게 넘어가면 국가 안보에 치명적이라는 것이 지도가 극비로 관리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진귀한 지도를 선물받은 지볼트는 매우 좋아했을 것입니다. 준비한 물품중에는 지도외에도 외부 반출이 불가한 물품이 상당히 많았는데 지볼트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 체류 5년으로 일본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뿐더러 일본의 관리와도 교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지볼트는 귀국후 ‘일본Nippon’이란 책을 저술할 정도로 일본 사정에 밝았습니다. (이 책에는 지볼트가 만났던 조선인들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 조선인들을 통해 들은 조선 사정이 이 책에 수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된 사람이 정부에 밀고를 하게 됩니다. 지도를 선물한 관리는  외국에 비밀을 넘긴 죄로 투옥되어 옥사한후 참시斬屍되었고 지볼트는 스파이로 간주되어 재입국이 불가한 영구 추방령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지볼트 사건입니다. 일설에는 정박중인 지볼트의 귀국선이 태풍으로 난파되었는데 이로 인해 흩어진 지볼트의 물품에서 반출 불가한 물품이 여럿 발견되어 이를 관청에 신고하면서 발각되었다라는 설도 있습니다. 지볼트는 받은 선물이 연구 목적에 사용될 것이라고, 전달 관리는 일본과 네덜란드의 우호 증진을 위해 주었다고 강변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하여간 아무리 일본 국익에 부합되는 활동을 하더라도 극단의 쇄국을 고집하던 에도시대에 기밀을 유출하면 단호히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낸 사건이라는 것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사건이지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사건이라고 합니다. (1856년 일본과 네덜란드의 화친 조약이 맺어짐에 따라 지볼트는 1859년 다시 일본에 올 수 있었습니다.)      


선양에 억류되었던 한국인 사업가가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래봅니다. 중국의 공안 규제가 갈수록 심해져 여차하면 스파이로 몰려 억류와 처벌이 이루어진다니 중국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면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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