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만년필
밑줄긋기, 메모하기, 낙서하기, 스케치하기, 색칠하기, 글쓰기.... 제가 만년필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만년필이 결코 싼 물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저가로 시작하지만 점점 비싼 만년필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편리하지도 않습니다. 잉크를 매번 넣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세척도 해 주어야 합니다. 필압을 세게 주면 닙(nib)이 망가지지도하고, 막 흔들고 다니면 잉크가 새기도 합니다.
만년필을 좋아하다 보니 늘 직면(!)하게 되는 것이 '만년필의 효용성'입니다. 참 어려운 것입니다. 효용이라는 측면에서 그리 높은 점수를 받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처럼 돈도 쓰고 시간도 쓰는 경우에는 이 놈의 효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그래서 한때는(지금도 하고 싶은데 잘 안되지만) 만년필로 그림도 그리고 짧은 생각도 써서 보여주곤 했습니다. 그때 했던 몇 개를 보여드리면...
만년필을 정말 정말 잘 쓰는 분의 책을 소개하려 합니다. 저도 이 분처럼 하고 싶지만 필력이나 그림실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자신 있게, 잘 쓴 책이라고 말하긴 저어하지만, 진지하게 썼다고 자신한다. 진심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이 책은 바로 "아무래도 좋을 그림"입니다.
제목이 '아무래도 좋을 그림'이지만, 사실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여행을 다니면 대상을 또 보고 또 보고 해서 그린 것이며, 정말 잘 그린 그림입니다. 만년필로 그린다는 것이 사실 어렵습니다. 한 획이 지나가면 지울 수도 없고 한 점에 머무르면 색이 종이에 퍼져 제대로 그릴 수가 없습니다.
'그림 같은 장면을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려보면 그림 같은 장면이 됩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려 보세요!' 정은우 님은 이야기합니다. 역시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번을 만년필과 종이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여행지에서 특히 볼 것이 아주 많은 낯선 여행지에서 천천히 풍경과 사물을 응시하면서 한 획 한 획 만년필로 그림을 그려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시간의 조급함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아주 천천히 여행해야 합니다. 저는 사실 '만년필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다니' 보다 '어떻게 여행지에 이런 시간을 가지지?' 가 더 경탄스러웠습니다.
이 책은 여행을 하면 그린 그림과 에세이를 묶은 책입니다. 총 90장의 그림과 84편의 에세이가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파트가 끝나는 부분에 만년필과 잉크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은우님은 처음 만년필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꼭 파일롯트의 프레라를 추천한다고 합니다. 가성비 100% 인정하는 만년필입니다.
같은 장소를 갔는데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림이 있을 때는 더 몰입하게 됩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했을 저자의 생각을 엿보는 것도 즐겁니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만년필의 효용성을 잘 보여 주는 책입니다. 조심스럽지만 그림이 에세이보다 좋았습니다. ㅜㅜ
정은우 님도 만년필을 참 좋아하는 분인 것 같았습니다. "편리하기 때문에 만년필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년필을 사랑하는 이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집념과 인간적임을 사랑한다" 고 서문에 밝히고 있습니다. 블로그가 워낙 유명하고 페이스북도 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맺어 보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은우 님 블로그 : http://blog.naver.com/timberguy
정은님의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20solskjaer
페이스북을 보니 이렇게 작업을 하는 것 같네요! 한번 만나보고 싶은 분입니다. 언젠가 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