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았다.
시작은 싸구려 맥주 한 캔과 함께 산책하며 새로 산 핸드폰의 야간 촬영 성능이나 테스트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생긴지 몇 년째이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식당을 보게 됐고, 나는 그곳의 주인이 두세번은 바뀌었을 수 년간 식사를 한 적이 없는 식당이 있다는 것에 생경함을 느끼며 내가 이 곳, 이 동네에 살아온 시간을 재어보고 말았다.
무려 20년이다. 6살 때, 허허벌판과 작은 마을과 우리 아파트만 우뚝 솟아있을 시절에 청량리 반 지하 집에서부터 이사온 이후로 상당한 시간을 살아왔다. 내가 어린 나이여도, 이십여 년이란 시간의 절대량은 무시할 수 없더라. 살았던 시간들을 새삼스레 인식하자, 발걸음 닿는 모든 곳에 내 추억이 공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술기운 덕분인지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은 머리를 꽉채울 수 있을 정도로 풍성했다. 내 몸의 움직임과 던지는 시선 하나하나가 오늘 밤의 밀도 높은 습기를 흔들며 추억들을 떨쳐내고 있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Damien Rice의 The animals were gone이 흘러나왔다.
저기는 내가 어릴 때 학원차에서 내리다가 무릎을 부딪혔던 곳이야.
한 이틀을 못 걸었던 것 같은데 바보같이 병원을 안 가고 꾹꾹참으며 고생했었다. 저기는 비비탄 싸움하던 곳이고. 그 친구들은 뭐하고 있을까. 중국집 아들도 있었고. 초등학생 때, 그 중국집 배달부가 내가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왜 쳐다보냐고 시비건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어릴 때라 무섭디는 않고 의아해 하기만 했었다.
대장 역할을 하던 어떤 친구는 우리 집에 놀러 왔다가 의자 다리를 부숴먹었던 기억이 나는군. 역시 애였던지, 잘못한게 무서웠는지 얼른 도망가더라. 그래도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는 하고 갔던 기억이 왜인지 온전하게 남아있다.그리고 저기 빅애플 슈퍼마켓은 원래 종이나라였는데, 주인 아저씨가 미니카 트랙을 설치해서 항상 아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아저씨와 아드님은 편찮으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떠실까. 요전에 오랜만에 고개를 꾸벅 숙여서 인사를 드린 것, 내 나름 용기있던 행동이었던 것 같아 수줍다.
이제 다시 아파트 입구구나.
저기는 동생이랑 놀러나가곤 했던 놀이터인데, 저기서 많이 괴롭히기도 했고, 괴롭힘 당하는거 복수해주겠다고 나섰다가 혼쭐이 나서 집에 울며 들어가던 곳. 더 걸어오니 여기는 또 누가 높은 층에서 던진 수박에 맞을 뻔한 동이잖아. 심증만 있던 그 유명한 천덕꾸러기 김xx는 뭐하고 살까. 잘 살진 않았으면 좋겠다. 질이 좋지 않았지. 내가 사는 이 곳은 아이들이 밝고 명랑하게만 자라기에는 힘든 축에 속했다. 팍팍하고, 건조했고, 모자랐다.
옆집은 시끄러웠고, 동네는 후줄근했다.
우리 집 앞 상가에 있던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여기저기 달려 다녔던 것도 기억났다. 그 여자애 집에 놀러갔다가 그 애가 내가 들어간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그 애 스스로(?) 상처 받았던 일도 있었지. 그러게 왜 열어. 그리고는 진학이 엇갈려 중학교 이후로 만나지 못했고, 스무 살 언저리에 아까 걸었던 그 식당 앞에서 아주머니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라면 성인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상념이 괴로울 때 떠돌던 거리를 그대로 걸었다. 그곳에도 기억과 과거가 한껏 묻어 있었다. 흔적의 물 속을 걷는 듯 했다.
누구 때문에 괴로워하고, 무엇때문에 방황했는가.
만나고, 헤어지고. 해가 지듯 당연하게 만나서 헤어졌을 뿐이다.(椎名林檎의 落日가사 인용.) 그리고 나는 그때와 같이 아직 떠도는가. 몸을 감싸는 시간과 관계의 기운, 옆구리와 볼 옆, 목 뒤를 어루만지며 흘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그것들을 나는 알맞게 엮어내고 있는가.
지탱할 수 있을만큼.
그렇게 나는 이 곳에서 가라앉은 커피 찌꺼기에 우유를 부은 듯 다시 휘저어져 있었다.
지금은 술이 깨서 돌아온 듯.
카우보이 비밥 마지막 화를 마저 봐야겠다.
이번 화의 제목이자 엔딩 곡의 제목은 The real folk blues다.
'THE REAL FOLK BLUES.'
Film, frame, focus, find.
4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