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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han Sep 30. 2016

<케빈에 대하여>, 리뷰.

예민함과 가족이란 굴레가 주는 고통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린 램지

★★★★★ (5/5)

'악'은 '선'이 자의식 없이 행하는 그 행동들이,
그 위선이 꼴보기 싫어서 악이 되고만 것이 아닐까.
그 때 선은, 악을 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용에 대한 스포는 없으나 영화 주제에 대한 암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상 후에 내용과 감정을 되새겨보며 깨닫는 과정이 진국이기에,

이 글에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두 가지의 포스터를 모두 보고 영화를 본 관객과 그렇지 않은 관객은 감상 포인트가 달라질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엄마 에바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관객은 사건이 일어난 이후 에바가 받는 처우에 연민을 느끼며 에바의 편에 서게 되죠.

우리는 그 영화 내의 시야에 의해
케빈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도록 유도되는 셈입니다.

감독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우리가 케빈을 공포의 대상으로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해설을 찾아보거나, 
인물들의 행동과 주제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나면
우리는 단지 케빈만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경솔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있게 됩니다.

에바는 아이에게 부모다운 사랑을 쏟을 수 있는 좋은 엄마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케빈은 그것을 알아챌 수 있을만큼 예민했고, 꿰뚫을 만큼 영민한 아이었죠.
네가 먼저, 아니 네가 먼저의 악순환이 고착됩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육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주는 영화도,
(감독이 임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고 밝혔듯 그 두려움을 내포하긴 합니다만!)
성악설을 지지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순수한 악이 무엇인가 논하는 영화도 아닌 듯 합니다.

약간의 왜곡을 통해 우리의 관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지,
곱씹어보게 해주는 영화이지 않나 싶습니다.


더불어 부모와 자식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포착해낸 감독의 예민함에 감탄을 표합니다.

어느 교수가 연구를 위해 학생들에게 부모에 대한 솔직한 감정을 적어내라고 했더니, 

대부분이 증오가 담긴 끔찍한 메세지였다는 카더라가 생각나는 군요.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의 평인
'악은 선을 알지만 선은 악을 알지 못한다'

라는 말은 저에게 있어
'선은 자신이 선하다고 믿기에 자신이 흘리는 악을 모르지만,
악은 선이 절대선에 부합하지 않는 위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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