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by 솔담

내 단짝 친구는 고등학교 때 사귀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남자 친구가 군대 간 사이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니 잘 살라는 말을 대신하며 친구 결혼식에 가지 않았습니다. 몇 년 뒤 친구는 전화로 이혼을 알려왔습니다. 저는 그때 오만했습니다.

"너, 그 말하려고 몇 년 만에 나한테 전화한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친구가 지내고 있는 친정으로 갔습니다. 손목에 난 상처를 보며 친구를 안고 울었습니다. "괜찮아, 아이들 만나려면 네가 건강해져야 해.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지 그동안 왜 연락을 안 했어?"

친구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으니 잘 사는 모습 보여주려고 노력했을 텐데 바보같이 또 친구에게 잘못을 미루고 말았습니다.


그 해 겨울에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건강도 좋아진 듯했고, 목소리도 힘이 있었습니다. 뚝배기에 총각김치와 들기름을 넣어 김치찌개를 만들어 함께 먹고, 커피를 마시며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총각김치를 보면 그 친구 생각이 납니다. 좀 더 좋은 음식을 해줄 걸...... 마음속에 있던 말을 이제야 해봅니다.


j에게


'이혼'이라는 말이 너에게 왔다는 게 너무 싫었어. 늘 당당하던 네가 주눅 들어 있는 것도 싫었어. 네가 어긋난 결혼을 잘 맞춰보려고 노력했을 때 친구라면서 모르고 있었던 나도 한심했어. 결혼식에 우리가 가지 않아서 너 혼자 많이 울었다고 했지? 결혼식에 안 간 것도 미안해. 이렇게 너한테 미안한 거 투성인데 난 제대로 말을 못 했어. 그때 나는 내가 이혼녀가 될 줄 모르고 오만했나 봐. 우리가 함께 장난 전화하고 밤새 이야기하던 친정의 그 방에서 네가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앉아있는 게 싫었어. 싫다는 마음보다 네가 힘들겠다는 그 마음이 먼저 들었어야 하는데 난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었다니?


네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할 때 함께 여행하다가 마치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일어난 것 마냥 너를 몰아세웠던 것도 미안해. 내가 볼 때 넌 완벽한데 자꾸 무너져 내리는 게 싫었어. 너의 두 번째 결혼마저 흔들릴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던 거 같아. 내가 이혼이란 거 해보니까 할게 못되더라. 당당하고 싶었지만 그냥 작아지는 나를 만날 때면 넌 그냥 지금 그대로 유지하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 잘 견뎌왔고 지혜롭게 지내온 너의 시간을 축하해.


오랜만에 만난 너는 환한 게 웃고 있었어.

네 인생에 주인공은 너.

너를 보며 나도 다시 용기 내어 본다.

어제는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었어.

약을 쓰면 통증이 가시니까, 통증이 미치지 않는 과거로 떠나는 거지. 행복했던 과거만이 있는 곳으로...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중에서

내가 옛이야기를 꺼내는 건 내가 투여한 약을 먹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과거의 우리의 행복했던 어느 지점으로 가서 힘을 얻고 돌아오는 거지. 내게도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너는 기억할 테니까.

안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가려주고 세상을 우리로부터 가려주지. 그래서 안개가 끼면 모든 게 변한 것 같고 예전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거나 손을 대지 못하지. 117p

아무도 우리를 찾아낼 수 없는 그 시간 속에 함께했던 j야 고맙고 미안해.

네가 10년 전 사진을 보내온 목요일 밤에 많은 생각을 했어. 우리에게 또 그런 날들이 찾아올까?

아니, 그런 날이 오도록 이제는 내가 만들어 갈게.

건강하게 잘 지내자.

사랑해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