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식도암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마음이 분주했다. 작은 어깨를 둥글게 말고 앉아서 결과를 들었을 부모님의 뒷모습이 생각나서 눈물을 훔쳤다.'괜찮아~ 우리가 그럴 나이잖니, 너 바쁘니까 빨리 끊어라'하는 자로 잰 듯한 엄마의 말이 서글펐다. 토요일 퇴근 후 부랴부랴 장을 봐서 아산에 갔다. 30분을 달리고서야 에어컨 버튼을 안 눌렀다는 걸 인지했다. 땀범벅이 된 것도 몰랐다. 아빠를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를 반복했다. 밝게 웃고 계시는 아빠, 엄마를 보고 나도 웃었다. 일찌감치 누워있는데 방문을 열고 엄마가 들어왔다. 잠이 쏟아지는 눈에 힘을 주며 버텼다. "오늘은 너무 재미있다. 딸하고 밤늦게까지 이야기하니까, 잘 자라." 하는 엄마의 얼굴은 정말 재미있어 보였다. 11시 24분을 보고 눈을 감았는데 눈 떠 보니 새벽 5시 40분이었다.
거실문을 살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잔디 사이사이 풀을 뽑고 뒤편 언덕에 자라난 약쑥을 낫으로 베고 정리를 했다. 거뭇해진 복분자를 따서 씻어놓고 김밥 준비를 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김밥을 앞으로 몇 번 싸드 릴 수 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고개를 들고 눈을 깜빡여 눈물을 집어넣고 열심히 말았다.
의사 선생님이 아들 있냐고 묻더란다. 아들이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데 바빠서 못 온다고 대답하는 아빠의 말을 이어받아 엄마가 내가 이 사람 보호자라며 나에게 말하라고 했단다. 가장 가까이 사는 나조차도 함께 가지 못하니 누구 탓을 할 수도 없다. 아이가 아파도 부모가 아파도 빠지기는커녕 일자리를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나. 이럴 때면 공무원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경찰공무원을 그만둔 언니는 관절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있다. 다행인 건 두 분이서 전철 타고 버스 타고 길을 잘 찾아다니신다는 거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를 보면서 언니를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이 생겼다. 태어나 가장 먼저 관계를 맺는 부모와 어긋나면 사는 동안 인간관계가 힘들어진다고 한다. 태어나서 8년간 부모와 떨어져 지냈던 언니는 내가 봐도 참 힘들다. 노노와 둘이 되면서 잘 지내던 남동생과 내가 무슨 이유로 멀어졌는지 모르겠다. 다시 만난 동생은 변해있었다. 하지만 동생이니까 언니니까 엄마니까 아빠니까 그냥 가족 안에 또 들어가졌다. 많지도 않은 다섯 가족의 얽힌 실타래는 매듭지어져 풀기 어려운 채 방치되어 있었다. 동생과 언니 사이에서 부모님 사이에서 나는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참 바쁘다. 결과는 안 보이고 그냥 바쁘기만 하다.
생각해보니 정말 가족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또한 둘만 남은 노노와 나의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나는 저 아이를 알고 있는 걸까?
십 년 전 사진을 보았다. 그때는 참 몸이 활발했다.
쉰이 되면서 주름이 많이 생기고 몸도 두리뭉실해졌다. 십 년 뒤의 나는 더 두리뭉실해지고 자글자글해진 주름을 보며 습하고 무더운 지금의 여름을 기억하겠지?
매미가 서럽게 울어대고 있다. 7일간의 매미에게도 가족의 애로사항이 있을까? 생각하다 피식 웃었다. 일생에 어렵지 않은 가족이 어디 있으랴. 홀로서기를 하는 순간은 늘 고통스럽지만 자유를 맞이하는 과정은 늘 그래 왔다.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한 슬기로운 선택을 하고 싶다. 부모님이 아닌 나를 위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자고 언니한테 말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지금 잘해보기로 했다. 답 같은 건 몰라도 되는 나이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