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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Jul 10. 2022

부모님 살아계실 때

지금이라도 감사의 방을 만들어야겠다.

누나, 아빠 살아계실 때 삼 남매 시간 맞춰서 아산 집으로 오라는대?

아빠 아프시대? 어버이날 가고 그 뒤로 안 가봤거든. 그 사이에 건강이 안 좋아지셨나?

만약 큰 언니랑 너랑 만나면 큰소리 날 거 뻔하니까 네가 참아야 해 알았지? 너만 소리 안 지르면 잘 넘어갈 거야.  동생에게 당부를 하고 언니에게 문자를 남겼다.

하루 이틀 지나도 읽고 대답이 없는 언니에게 동생하고 나는 7월 2일 토요일 퇴근하고 간다고 다시 문자를 남겼다. 며칠이 지난 뒤 언니는 2일 날 잘 다녀오라는 문자만 남겼다. 전화해도 안 받고 달랑 문자만 남긴 언니는 그냥 언니다웠다.


내가 도착해서 점심 먹고 커피 마실 때는 아무 말씀 안 하시던 부모님이 동생이 도착하자 말씀을 꺼내셨다. 아빠가 6월부터 음식을 못 드셔서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큰 병원 가보라고 해서 순천향 병원에 예약을 해놓으셨단다. 언니가 못 온다고 해서 맏딸이니까 전화로 미리 이야기를 했단다. 다음날 새벽 5시에 다시 전화 한 언니는 자기는 데려온 자식 취급하더니 이번에도 그런다면서 없는 자식이라 생각하라고 전화를 먼저 끊어버렸단다. 정말 언니다웠다. (부천 집은 남동생 주고 아산 집에 들어간 부모님 돈 오천만 원을 언니 준다고 했더니 그 사달이 나버렸단다. 한 푼도 못 받는 건 난데 왜 언니가 그 난리를 친건지 모르겠다. )


3년 전에 큰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진 뒤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큰엄마가 살아계심에도 불구하고 사촌들은 재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만나기만 하면 싸운단다. 이를 가까이서 지켜본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 싸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거다.


우리 부모님은 재산이 많지 않다. 아빠는 경찰을 중간에 그만두셨기 때문에 연금도 없다. 동생과 나는 재산 1원도 안 받아도 된다고 했다. 부천 집을 팔아서 작은 빌라로 이사를 한 뒤 집을 담보로 나라에서 생활비를 주는 모기지론인가?를 신청하기로 했다. 아산 집도 비워 둘 수 없으니 팔기로 결정했다. 나는 융자금 안내서 좋다고 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온 동생이 두 분 돌아가시면 절에 모셨으면 한다고 운을 뗐다. 엄마는 너네 아빠랑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 나 죽으면 고향 안동에 재를 뿌려달라고 하셨다. 그동안 듣기만 하던 올케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는 '어머님, 자식들 생각하셔야 해요. 어머님 아버님 다른 곳에 계시면 자식들이 명절날 얼마나 바쁘겠어요. 자주 못 가고요. 그러니까 자식들 생각해주세요.' 그 말을 들은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올케 말도 참 예쁘게 한다.


큰 누나 서운하지 않게 작은 누나가 가운데서 잘 전달하라고 한다. 엄마 팔순잔치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으란다. 언니는 일주일이 지나도 답이 없다. 문자를 읽기만 한다. 전화를 하니 안 받는다. 내 친언니만 아니면 연락 안 하고 모른척하고 살고 싶다. 엄마는 그래도 네가 언니를 챙겨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말씀하신다.


나중의 일은 나중의 일이고 12일 날 검사 결과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 너무 말라서 뼈만 남은 아빠의 팔을 보니 눈물이 찔끔 났다. 너네 아빠 없어도 나 혼자 살 수 있다던 엄마도 마음은 안 그런 것 같다. 병원 대기실에 혼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을 엄마 모습이 생각나 또 눈물이 찔끔 난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내 마음속의 원망도 비워내야겠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의 방을 만들어 놔야겠다.

헌 책방에서 이 책을 빼어내던 날 가졌던 마음을 다시 끄집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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