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변호합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by 솔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토요일 오후. 퇴근을 한 후 소파에 누워있는데 잠이 스르르 왔다. 그냥 잘까? 양치를 할까? 갈등하다 일어나 양치를 하는데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장바구니를 든 아빠와 검정 비닐봉지를 든 엄마가 신발을 벗고 있다. "너네 집에나 가야 스파게티랑 피자 먹는데 거기 가지. 우리 집에서는 맛있는 게 없다."라고 며칠 전 전화해서 말하던 엄마의 말이 기억이 나서 낮잠은 틀렸구나 포기하고 입을 헹구고 나왔다.

게임을 하다 놀라서 인사하는 아이에게 "일찍 왔네"하고 돌아서는 엄마가 나를 보더니 "너 없는 줄 알고 와서 냉장고에 감 넣어놓고 가려고 했는데, 너도 일찍 왔네?"하고 묻는다.

"토요일이라 4시쯤 왔어 엄마."

"일찍 왔네"라고 다시 말하는 엄마에게 "일찍 와서 누워 있었어."라고 대답을 했다. 토요일 쉬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엄마에게는 사라진 기억인가 보다.


"버스에서 왜 장바구니를 풀러?"하고 큰 목소리를 내는 아빠와 "다시 잘 묶으려고 했지." 하는 엄마 사이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아빠! 커피 한잔 드릴까요?"하고 물으니 "너네 아빠 커피 한잔 줘라" 하는 엄마에게 눈을 끔뻑했더니 이해를 했는지 하던 말을 멈추신다. 버스 타고 전철 타고 또 버스를 타야 우리 집에 오는데 버스 안에서 엄마가 묶여있는 장바구니를 푸는 바람에 감이 데굴데굴 버스 안에서 굴러다녔단다. 야광색의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것도 창피했을 아빠가 중심을 잃어가며 감을 주으러 다녔으니 화가 나실 만도 하다.

아빠도 딱 한마디만 하고 끝나셨고 엄마도 거기까지 하고 끝이 나서 다행이었다. 아빠와 커피 한잔을 하고 나니 큰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병원에 가신다며 일어나셨다.


친가 쪽 식구들 사이에서 나는 C시의 전원주택에 살며 이혼녀도 아니다. 큰 집과 20분 거리에 살고 있고, 사촌 언니들과도 같은 P시에 6년째 살고 있지만 다행인지 스치듯 만난 적이 없다. 엄마가 이혼 한 딸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알고 있는 나는 엄마의 뜻을 거역할 마음도 없다. 남들도 그렇게 대할 거라 생각하는 엄마에게 반기를 들어봤자 또다시 되풀이될 모녀 사이의 관계의 모호성에 대항할 기운이 남아 있지를 않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나를 위한 구차한 변명일 수도 있다. 싱글맘을 바라보는 시선과 나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상대로 마주 보고 싶지 않지만 마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엄마를 집어넣는 일이다.

병원 근처까지 함께 가는데 걸음걸이가 빠른 아빠의 뒤를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열심히 따라가 보는 엄마가 낯설다. 일주일 전보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엄마의 모습이 안타깝다. 기억을 잃어버린 만큼 얼굴에 드리워진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슬프다.


일주일 전 친정에 가서 저녁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몇 달 전 엄마가 보험에 가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40년 동안 보험일을 했다는 엄마의 친구가 집으로 찾아와 엄마는 가입이 안되고 아빠는 가입이 된다며 아주 좋은 거라고 하셨단다. 부산에서 만났을 때 아빠의 생년월일을 건네준 상태였고 계약서에 사인만 하면 아파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두 분은 한 달에 150,000원씩 6개월째 납부하고 있었다. 내가 “암보험이 있는데 또 암보험에 가입을 했으니 해약하세요.”라는 말을 하자마자 엄마가 아빠를 향해 큰소리로 욕을 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에 있는 옷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전에도 경험했는지 그냥 무덤덤히 계셨고 오히려 내가 당황을 해서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옷을 잔뜩 쌓아 놓은 엄마에게 다가가 “옷 정리 다했어? 이제 주무셔요. 내일은 김밥 싸서 소풍 가자 엄마” “딸하고 소풍 가네. 좋다” 하며 방긋 웃는 엄마의 천진난만한 표정에서는 아빠에게 욕하던 엄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잠든 지 4시간쯤 지났을까? 엄마의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언니네 집에 김치가 없다며 김치를 담근다고 하신다. 고춧가루 넣은 것을 잊어버린 엄마가 또 넣는 바람에 무 다섯 개를 더 썰어 넣어도 아직도 빨갛다.

졸린 눈을 비비며 엄마와 김치를 담그고 김밥을 싸고 있는데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김밥 맛있다! 단무지 남겨놔라. 내가 나중에 또 싸서 먹게”하는 엄마. 점심을 해서 먹고 집에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한 후 누웠는데 깨보니 다음날 아침이다.

“아빠, 많이 힘들지? 내가 자주 찾아갈게. 엄마랑 행복하게 지내셔요. 사랑해요” 하고 문자를 보내고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냈는데 야광색 장바구니와 검은 봉지를 들고 나타난 부모님. 보험 해약금 23,000원을 받아 더 손해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점심 사드시고 남은 돈으로 사 온 단감일까?


병원 근처까지 모셔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검은 비닐봉지를 풀어보니 저번 주에 갔을 때 아이가 먹지 않아 안 가져간다고 한 얼린 소꼬리 고은 국물 두 덩어리가 들어있다.

이제 시작인데 엄마의 기억과 싸울 힘이 우리에게는 얼마만큼 남아있을까?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나의 겨울과 우리의 겨울은 어떻게 기억될까? 하루하루는 참으로 긴데 벌써 11월의 중순이 지나고 있다.


아이가 묻는다.

"엄마, 기억 안 나?" "어떤 거?"

"내가 저번에 들려줬잖아."

"기억에 없네"

사실 나는 방금 덮은 책 제목도 방금 보고 나온 영화 제목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 엄마도 치매 약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엄마는 치매 걸리는 나이는 아니지?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치매에 많이 걸린데."

"엄마, 빨리 병원 가봐. 엄마가 자꾸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까 겁나"

"네가 엄마를 보호해야 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나 보다....."

"내가 지금도 엄마 보호하고 있잖아. 그건 당연한 거고, 엄마 아프면 안 돼!"

"병원 갈 시간 없어서 아프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네가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아봐. 할거 없음 책이라고 읽어......"

대답이 없는 아이는 어느새 유튜브 속에 들어가 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묻는 영화 증인 속 대사처럼

내 기억은 늘 나의 변호인 역할을 한다. 기억 속 잘못은 네가 했고 늘 나는 옳다.


그러기에 인간은 또 내일을 맞이하고 웃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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