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내 평균은 80점대에서 90점대 초반이었다. 키도 작아서 앞쪽에 앉아 고만고만한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냈다. 뒤쪽에는 그룹과외를 하는 친구들이 앉았고 성적도 90점대 후반이었다. 고만고만한 내 눈에 그들의 틈에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없어 보였고, 그 중 한 친구의 집에 가면 놓여있는 그랜드 피아노의 크기만큼 부러웠다. 내 책상에 놓여있는 종이로 된 피아노 건반이 생각나서...... 그때는 그랬다.
아빠의 실직으로 중학교 1학년 때 시골의 작은 마을로 전학을 갔는데, 그룹과외를 하는 친구도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친구도 없었는데 나의 성적은 그대로였다. 고등학교를 낮춰서 가고서야 성적을 유지해야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을 토해내지 않기 위해 소위 말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학생이 되었다. '싫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지냈으니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았고, 키도 쑥쑥 자라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30년 뒤,영등포의 길거리에서 초등학교 친구들이 나를 보고 처음 뱉은 말은 "잘 컸다"였다. 그들이 판단하는 건 겉모습이었다. 얼굴을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밴드에서 쌓여가는 글만큼 우정도 쌓여갔다. 누구누구의 엄마도 아빠도 아닌 ‘나’로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어제 송년회에서 H가 했던 이야기가 머리에 맴맴 돈다.
“J 보며 드는 생각은 부모의 뒷받침이 중요한 것 같아.(J와 H는 절친에 성적도 상위권이었다.) 난 주말에도 일하기 때문에 평일에 쉬거든. 혼자 산에 올라가 컵라면에 사온 김밥을 먹으며 드는 생각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어. 누구랑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집에 가도 혼자야. 와이프는 평일에도 쉬지 말고 일 하라고 해. 소주 두병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
“그걸 넘어서야 해. 그러면 나처럼 초연해질 수 있거든”하며 웃었지만 H는
“야, 너처럼 잘 큰애가 그런 말을 하니 참 싫다! 네가 힘들었다고 하는데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하고 말을 한다.
내 상처의 크기가 가장 커 보인다.
성적이 좋으면 사회에서도 점수만큼 대우를 받고 점수만큼 잘 지낼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버린 나. 그 사람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 사람인양 대하는 사람들. 그 속에서 한없이 작아지기에는 난 너무 많이 무뎌있었다. 잠시 힘들어하고 또 툭툭 털며 내일을 맞이한다.
새벽 첫 버스를 타고 건물의 청소를 하러 가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일하지만 ‘어? 여기서 타는 그 사람은 오늘 버스를 왜 안 타지? 어디 아픈가?‘하고 걱정한다는 것을 기사에서 읽었다. 그들이 빌딩 청소를 하며 지내는 것은 남들보다 덜 부지런해서도 아니고, 남들보다 부족해서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없어서 하고 있고 하다 보니 잘하게 돼서 그 일을 하는 것뿐이다.
내가 살면서 제일 잘한 건 “첫째는 우리 부모님 아들로 태어난 거, 둘째는 우리 와이프 만난 거, 셋째는 담배 끊은 거야.”라고 말하는 O.
“난 술도 담배도 일찍 배웠어. 우리 때는 어른들 보면 담배를 피우다가 숨기고 도망가고 그랬는데, 요즘 애들은......”하고 말을 멈추다가
“좋은 대학 나와서 한 달에 이삼백 버는 애들 많아. 공부 잘한다고 돈 많이 버는 거 아니거든. 인성이 잘돼야 하는데”라고 말을 이어나갔다.
O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누나, 나는 00 엄마랑 같은 날 손잡고 죽고 싶어. 00 엄마 만난 게 나한테는 행운 같아”라는 동생이 생각났다.
O도 동생도 지금 느끼는 행복의 크기를 알 수 있었다. 힘들게 일하겠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학창 시절 성적과 사회에서 얻는 만족감의 크기가 같지 않다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나. 그러면서도 노력하지 않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행운만은 기대하고 살지 않았나? 생각해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며 지금도 하고 있는데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기에는 가진게 너무 없는 나는 물 위에 우아하게 떠있는 백조가 되기위해 보이지않는 곳에서 열심히 허우적 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