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전화를 거는 여자

내 아픔이 제일 커 보인다.

by 솔담

보일러 점화되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눈을 떠보니 새벽 다섯 시.

10이라는 경고문이 떠있어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전원 코드를 뺐다가 다시 꼽으면 된다고 한다.

따라 해 봐도 경고문이 없어지지 않아 전원 코드를 빼놓은 상태로 다시 인터넷 검색을 했다.

고객센터 전화번호가 나오고 24시간 상담 가능하다는 문구를 스쳐가듯 보고 다시 코드를 꼽았더니 보일러가 정상 가동되었다.



평일보다 한산한 길을 달리다 문득 드는 생각.

24시간 상담 가능이라는 문구가 떠오름과 동시에 정말 새벽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했던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죽고 싶었던 그때.


나만 빼고 남들은 모두 행복해 보이던 그때.

아이를 재워놓고 밖에 나가 숨죽여 울던 그때.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누르지 못하면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받는 상대의 목소리가 갈라졌지만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이기적인지......)

내가 제일 큰 아픔을 안고 있었기에.
(그때 나의 관점에서)


너무도 성실히 들어주었고 너무나 친절하게 받아주었던 여성의 전화.

남편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 날도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게 나을까요?"라고 물었던 것 같다.


새벽에 잠을 자다 죽고 싶다는 전화를 받는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절망적인 말만 들어야 하는 상대의 마음이 왜 오늘 생각이 났는지......

그때 나의 말을 들어주던 그분께 정말 미안고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다.


가만히 있다가 울음이 나와 참을 수 없을 때 끊이지 않던 절규를 듣고 멀리서 산골까지 달려와 준 유*언니.


잘 지내는지 주말에 찾아와 해골 같은 나의 몰골을 보고 어려운 가족사를 털어놓으며, 자살을 하면 남아있는 가족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내는지 이야기해주던 혜*언니.


그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나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달려가 주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 실내 온도조절기 전원이 아예 들어오지 않는다.

AS센터로 전화를 했더니 " 두 시간 뒤에 담당 기사분이 온다"는 말에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었다.

토요일 다섯 시에 퇴근해 지친 나처럼 그분들도 힘들 것 같았다.

기사님은 방문 대신 전화 상담으로 보일러가 노후돼서 교체해야 한다는 말을 했고 월요일 아이 학교 끝나는 시간으로 예약을 잡느라 주말 저녁시간도 그렇게 흘러갔다.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불쑥 생기기 마련이다. 산골에 살 때 보일러 고장으로 몇 번의 바가지를 쓴 경험이 있는 나에게 이사 와서 6년 만의 보일러 교체는 껌이다. 거기다 컨덴싱으로 교체하면 내년에 20만 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 하! 하!

그때는 죽을 것만 같고 나만 손해 보는 것만 같았던 일들이 시간이 지나니 소중한 경험이 되고 추억이 되어 돌아왔다.

마냥 힘들어만 할 수 없지 않은가......

지금 몹시 힘들지만 또 버텨보리라.

흰 백발이 되어 지금 시간을 돌이켜보며 힘을 얻는 날이 올 테니까.

아픔이 아픔으로 끝이 나지 않고 시간이 지나니 흐릿하게 보이는 물안개 같다.

시간이라는 약을 처방받은 나는 성실히 투약시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나도 열심히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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