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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덕대게 Mar 23. 2024

어려운 영화를 마주했을 때

<아지랑이좌> - 스즈키 세이준

아트나인에서 진행 중인 스즈키 세이준의 다이쇼 로망 삼부작 중 <아지랑이좌>를 감상했다. 영화를 공부하다 보면 상당히 난해한 작품들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데이빗 린치의 작품처럼 내러티브 자체가 해체주의적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영화들이 수두룩하다. 유명한 작품으로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인랜드 엠파이어> 같은 작품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감상을 글로 남기는 나의 입장에서 이러한 류의 영화를 보고 나면 두려움이 먼저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혹여나 아무것도 기록하지 못하면 어쩌나, 감상의 경험이 아무것도 없이 휘발되면 어쩌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상영관의 불이 켜지고 나면 이내 영화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가 버린다. 영화를 보며 열심히 메모했던 쪽지를 보고, 다시금 영화의 기묘한 세계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아지랑이좌>는 근래에 본 작품들 중에서 가장 충격적일 정도로 어려운 작품이었다. 카메라워크와 편집의 연속성은 찾아볼 없었고, 내러티브의 통일성은 실험적이다 못해 전위적이었다. 다이쇼 시대의 배경 지식조차 희박했던 나는 영화의 갈피조차 잡지 못한 상태로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종류의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오히려 잃었던 삶의 의욕이 다시금 숨을 헐떡이는 느낌을 받는다. 일종의 오기라고나 할까. 아직은 부족한 나의 식견을 빨리 발전시키고자 하는 본질적 욕망 같은 것이 자아의 깊숙한 부분에서 열정적으로 끓어오른다. 몰입의 경지에 도달하여 주변 환경을 잊고 온전히 영화 앞의 단독자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이 시간뿐이다. 내가 이 영화를 뚫어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시간 동안의 나는 분명히 발전했고, 영화를 말 그대로 '즐겼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려운 영화에서는 작품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뭔진 모르겠으나 뭔가 있는 것 같은 그 기분. 그 '무언가'를 내 나름의 시선으로 독해하는 것이 나의 역할일 것이다. 영상 언어의 방법론은 무궁무진하다. 카메라워크부터 편집까지. <아지랑이좌>는 그 모든 영상 미학적 문법을 해체하고 붕괴시키는 전위 영화였다. 그토록 꼬아놓은 내러티브를 나름대로 일관된 해석으로 정리한 뒤, 나만의 시선으로 영화 감상의 경험을 정리하는 것. 그것이 내가 만족할 정도로 성공했을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와 정복감은 내가 이 일을 계속하도록 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어려운 영화를 보았을 때 필연적으로 느껴지는 좌절감이 있다. 그러한 좌절감과 자존감 하락을 열정으로 뒤바꾸는 방법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된다. 쉽게 말하면 영화가 자아보다 잠시 앞서 있으면 된다. 영화 감상의 경험은 단순한 향유의 경험이 아니다. 타인의 자아와 나의 자아가 교류하는 과정이다. 즉, 이 순간만큼은 나의 자아를 일정 부분 내려놓고 타인이 제시한 타자의 시각적 이미지를 수용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영화라는 매체는 일방적이지 않다. 쌍방향적 소통이 가능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보이지 않는 교류, 그 시네마적 공명의 순간. 그 순간에는 영화라는 개별 작품이 우리의 자아보다 앞서 있다. 한 작품과의 교류는 마치 인간관계와 같다. 인간관계가 쉽지 않듯이, 작품을 이해하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나는 어려운 영화가 좋다. 그 복잡하고 속을 알 수 없는 공백을 나의 관점으로 채워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삶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의미의 간극을 봉합해 나가는 과정은 시네마적 체험의 극단이다. 설령 내가 해석한 것이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내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그 해석의 과정 중의 주체로서 내가 이루어낸 성취의 계단들과 사유의 깊이가 깊어지는 과정은 분명히 나라는 사람의 절대정신을 높였으리라. 영화라는 매체가 너무나 사랑스러운 점은 모든 부분에서 독자로 하여금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창작자와의 보이지 않는 교류. 이 부분에서의 편집은 왜 이런 방식으로 되었는가. 이 쇼트의 앵글은 왜 이토록 기묘한가. 이 부분에서의 인위성은 의도된 바인가.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자문자답해가며 영화에 대한 일과된 해석, 내지는 견해를 완성해 가는 과정은 즐겁다 못해 일종의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진다. 그러한 물음표가 유독 거대한 물음표로써 집합되어 있는 것이 앞서 언급한 '어려운 영화'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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