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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덕대게 Mar 29. 2024

연극배우와 무대 장치의 분리

<디태치먼트> - 토니 케이

부조리론을 주장한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되는 토니 케이의 영화 <디태치먼트>는 우울의 극단을 달리는 영화 중 한 편으로, 영화를 보고 나면 마치 광활한 먹구름 아래에 덩그러니 놓인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철저한 고독의 삶 속에서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냉소의 전언. 자살밖에는 해답이 없다는 메레디스의 읊조림. 세계의 부조리와 침묵으로부터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를 요구하는 인간과 침묵하는 세계 사이의 관계는 이전에 작성했던 <이니셰린의 밴시>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알베르 카뮈는 이 감정을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명확히 설명한다. 마치 산 정상까지 힘들게 끌고 올라가면 다시금 떨어지는 무거운 돌덩이를 무한히 지고 올라가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의 최후는 정해져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시시포스가 어떤 행동을 취하든지 바닥으로 추락하는 돌덩이처럼, 인간이 삶에 있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나가더라도 그 최후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은 과연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시지프 신화]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실존은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따위의 철학적 논제들은 차순위이다. 일단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이 세계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진정으로 고민해야 할 최우선의 철학적 논제는 자살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뿐이다. 

<디태치먼트>는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다. 우울의 수렁 속에 빠진 이를 타인이 구원해 줄 수 있는가. 이는 마치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가 던지는 코멘트와 비슷한 결이다. 결국 구원당하는 객체나, 구원하는 주체나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 우리는 이 대전제를 잊어선 안 된다. 모든 인간은 세계라는 부조리 내에 놓인 현존재들일뿐이고, 각자 나름의 결핍을 앓고 있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관계'란 모순적이다. 


인간은 탄생부터 '애착'에서 비롯되었다. 부모 간의 사랑과 애정에서 비롯되어 탄생한 존재가 우리들이고, 타인과의 관계 - 교육을 통해 사회화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결핍이 찾아왔을 때, 인간은 애착과 완전히 반대되는 '분리'의 개념을 맞닥뜨리게 된다. 여기서 결핍이란 단순한 일상적 사건이나 해프닝 따위가 아니다. 실존적 가치 상실의 순간이다. 이 순간 인간은 지금까지 애착을 기반으로 살아왔기에 경험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실존적 결핍을 충족시켜 줄 정도로 여유로운 존재자가 아니다. 오히려 실존적 결핍의 순간에 타인과의 접촉은 타인의 결핍마저 잡아먹게 된다. 마치 극 중 메레디스처럼 말이다. '애착 - 붙음'과 '단절'의 경계 위에 놓인 인간은 그 선택의 기로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독에 낯선 존재다. 실존 근거 상실의 순간에, 부조리한 침묵의 세계를 직면한 순간에 느끼는 감정. 이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직시하고 니힐리즘에 빠져버린 순간, 우리는 철저한 이질적 고독에 빠진다. 그리고 그토록 고독한 부조리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카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극배우와 무대 장치의 분리.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의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을 느낀 존재자는 고독을 두려워하며 탈출구를 찾는다. 그리고 다시금 카뮈의 말로 회귀한다. 자살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메레디스는 결단을 내렸다. 나는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만약 삶을 이어간다는 선택을 내렸다면, 그 실존 근거는 무엇인가? 이토록 광활한 우울의 구름 아래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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