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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덕대게 Apr 15. 2024

한국 사회와 영화의 틈

영화의 관성

애초에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영화가 예술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영화도 결국 산업이다.'라는 말로 토론이 귀결되는 모습은 애초에 대중들에게 영화가 예술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대한 방증일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영화가 산업에 앞선 예술이라는 것조차 대중들에게 설명해줘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놀랍지도 않은 것이, 문학이라는 예술을 객관식으로 풀이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현 교육과정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화는 대중의 욕망을 만들고, 대중의 욕망은 문화를 만든다. 아도르노가 예측한 이 영속적인 굴레는 변하지 않는다. 한국의 예술 교육이 꿴 첫 단추는 완벽한 실패로 나아가고 있다. 변화와 혁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영화는 근 5년 간 전혀 발전하지 않았고, 참혹한 작품성을 지닌 영화들이 관성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대중들은 이러한 영화들에 익숙해져 있다. 한국 영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뀌어야 하며, 대중의 수요가 변해야 한다. 


사실 이러한 영화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보다 이 참혹한 상황에서 누구 하나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대중들의 모습이 사실 더 큰 문제이다. 이는 대중들이 완벽하게 대기업 자본력을 동원한 상업 영화에 길들여져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일 것이다. 영화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변화의 아우성을 치는 것조차 한계가 느껴진다. 냉소적인 시선에서 봤을 때 영화계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한국 영화계가 변하든 말든 큰 상관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선을 바꿀 것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고, 영화 감상을 단순한 오락 행위로써 즐기는 이들을 일갈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지금 제시하고자 하는 문제는 비단 영화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예술적 사유'의 능력이 배제되어 있는 상황이다. 


영화를 예술적인 시선에서 바라보든 말든, 한국 영화계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하든 말든, 사실 엄청나게 큰 변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예술로서 대하고, 전반적인 예술적 사고에 대한 절대정신이 향상한다는 것은 곧 다원주의적 사고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술의 감성주의적 - 공동체주의적 속성은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과적 사고는 중요한가, 당연히 중요하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고, 이성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며, 이렇게나 거대한 문명의 발전을 이룬 것 또한 이성의 산물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구어낸 문명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타인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생각만으로 살아가는 이들만 사화에 넘쳐난다면 그것은 과연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갈등의 홍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두룩한 갈등이 넘쳐난다. 세대 갈등, 정치 갈등, 젠더 갈등, 수많은 이데올로기적 대립각을 지니고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다. 이 수많은 갈등이 과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보인다. 한국 사회는 철저히 이과적 교육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 산업조차 수리/과학 영역의 산업이다. 한국은 이에 도취되어 버렸다. 이과적 교육을 제외한 모든 종류의 교육을 소홀히 했고, 그 결과 현재의 갈등 사회가 조성되었다. 이과적 교육은 정답과 해답이 정해져 있다. 좋게 말하면 명확한 학문이고, 이를 사회적으로 나쁘게 해석한다면 '흑백논리'로 전개될 우려가 있다. 이것을 변증법적으로 잡아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에는 해답이 없고 정답이 없으며 모두의 목소리가 정답이 될 수 있다. 안정적인 사회란 이과적 사유와 문과적 사유, 예술적 사유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공동체의 정신으로 가득 찬 문명일 것이다. 


돌고 돌아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결국 한국 영화가 대부분 '그저 그런' 작품들로 치부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대중들의 수요 때문이고, 이러한 대중들의 수요는 교육 때문이며, 이러한 편향적 교육의 결과로 사회가 갈등에 절여졌기 때문에 대중의 이데올로기를 일정 부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글만 보면 필자의 의견이 다소 전위적이고 급진적이라고 보일 수 있으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정상적인 사회라고 하기엔 너무나 타락하지 않았는가. 그 모든 뿌리에는 이데올로기를 심어내는 교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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