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덕대게 May 08. 2024

베르나르 뷔페 전시 후기

<천재의 빛: 광대의 그림자>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베르나르 뷔페 전시회는 예상보다 더욱 깊고 풍부했다. 전시는 바다 생명체로부터 시작된다. 첫 번째 작품, <바닷가재>, 1948로 만난 베르나르 뷔페 작품의 첫인상은, '카프카적이다!'라는 감상이었다. 굵은 선, 기하학적 배경. 생명체임에도 정물화인 것만 같은 실존적 회의주의의 투영. 그에게는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우라'라는 것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가오리와 씀뱅이에 이어서 전시되는 '꽃' 시리즈. 아름다움의 상징인 꽃이 베르나르 뷔페 특유의 그림체와 만나 그로테스크한 부접합의 미학을 발산하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의 정물화는 비참하다. 왠지 모르게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전시의 큐레이션 속에서는 표현주의적인 그의 그림이 당시 겪고 있던 가난을 투영한 결과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환경은 정신을 지배한다. 그렇게 가난에 잠식된 예술가적 정체성이란 미의 상징인 꽃의 개화마저 서늘하도록 날카롭게 만든다. 특히 그의 작품, <아티초크 꽃>은 그의 직선에 베일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검은 직선이 현현하다.


뷔페의 <양>은 후에 전시될 그의 작품에 대한 암시였을까. 기독교적 함의 - 희생양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이, 전시의 흐름상 이 그림 이후로 뷔페의 삶에 닥친 고난을 서술한다. 뷔페가 그리는 인간의 이미지는 다분히 자조적이고 음침하다. 마치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간과 전쟁, 잔혹한 살육의 이미지는 전후의 프랑스 시대상을 반영론적으로 투영하고 있고, 일찍 부모님을 여읜 그의 비통한 삶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나는 그것을 그린다'라고 말하면서 얼굴에 분을 칠하고 광대를 그리는 아이러니. 자조적인 시선의 정점에 달한 표현이 아닐까. 가장 함축적으로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인간을 가엽게 여기는 카프카적 시선의 극치였다. 전시장 내부를 가득 채운 그의 아우라는 관람 내내 당신을 사로잡기에 충분할 것이다.


뷔페가 바라보는 인간은 생기가 없다. <젊은 여인>을 비롯한 여인 시리즈와 광대 시리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마치 정적인 사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신을 드러낸다. 그리고 전시장 내부에는 이러한 뷔페의 시선을 노골적으로 투영하듯이 곳곳에 거울이 배치되어 있다. 관객 스스로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그들은 느끼게 된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뷔페화' 되었다는 불쾌한 현실을 말이다. 


광대는 온갖 변장과 희화화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메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광대로 기억되고 싶다. 뷔페는 위와 같이 말한다. 즉, 있는 그대로의 스스로에게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의 전언이 될 것이다. 뷔페가 바라보는 인간상은 가엾고 보잘것없다. 그들은 부족한 점 투성이이다. 어서 빨리 얼굴에 분을 칠하고 스스로를 지워라. 그렇지 않으면, 세상으로부터 증오라는 선물을 잔뜩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는 '아나벨'이라는 뮤즈를 만나 일시적 평안을 마주한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파킨슨 병은 뷔페가 21세기를 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죽음> 시리즈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광대로 남고 싶다던 그가 가슴이 풍만한 해골을 그리며 세상을 떠난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재생산성이 함축된 해골의 초상, 마치 여성적 모성애를 그대로 품고 있는 듯한 육신의 와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뷔페의 태도가, 아니 어쩌면 인간 자체를 바라보는 그의 태도가 아나벨의 사랑을 통해 조금은 희망적이게 바뀌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작가의 이전글 한국 사회와 영화의 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