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엉망진창 같았던 어느 가을, 나는 아무 계획 없이 치앙마이로 떠났다. 누더기 같은 마음으로 도망치듯 떠난 그곳에서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불안을 이겨내는 치유 명상에 관한 책이었다.
눈을 감았다. 스무 살 초반, 혼자 떠났던 뉴질랜드 퀸즈타운 풍경을 떠올렸다. 언젠가 부모님을 모시고 다시 오겠노라 다짐했던 장소였다. 눈앞에는 설산이 고요하게 펼쳐져 있고, 윤슬이 빛나는 강물이 산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품고 있던 곳. 강가에 앉은 나는 상상 속에서 아버지를 불러냈다.
그는 빡빡머리에 고통이 스민 얼굴, 빼빼 마른 몸으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등장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웃는 얼굴은 일평생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아픈 모습만 반복되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세차게 고개를 저어 다시 불러내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건강했던 어느 날의 아버지가 힘겹게 떠올랐다. 나는 그 모습을 꽉 붙잡아 내 옆에 앉혔다. 그러자 그동안 마음속에 잔뜩 뭉쳐 있던 말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가장 나약한 말들이었다. 그는 묵묵히 듣고 한참 동안 나를 다독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우리 공주, 우리 딸’이라고 불렀다. 그 목소리가 마치 시간의 벽을 통과해 내게 닿는 듯했다. 당신의 인생을 잡아먹은 내가 전혀 밉지 않다는 듯 여전히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내내 아팠던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더 익숙해질 때까지 줄기차게 만났고, 할 말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럴수록 오래전 무너져 내린 나의 기둥이 내 마음 깊은 어딘가에서 다시 세워지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기억의 밑바닥에 새까맣게 묻혀 있던 한 날의 저녁 풍경이 떠올랐다. 여느 날처럼 퇴근 후 막걸리 반주를 곁들이던 저녁,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빠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너희만 행복하면 돼. 그거 말고는 바라는 게 없어.”
그날은 유독 힘이 부친 날이었을 것이다. 몹시 서러운 날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막걸리 한 모금 삼키고 나를 보며 마음 깊이 다짐했으리라. 저거 때문에라도 내가 견뎌야지.
그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리고 나서야 내가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적한 불상 앞에 앉아 다짐했다. 이젠 정말 행복해지겠노라고. 아버지가 당신의 생을 걸고 내게 주고 싶었던 건 오직 나의 행복임을 이제야 기억해 냈다고. 이젠 억지로 강해지려 애쓰던 마음을 내려놓고 나의 행복을 위해 살겠다고.
그 후로 매일 글을 썼다. 침전된 기억 속에 가라앉아 있던 아버지의 조각들을 하나씩 건져 올렸다. 수많은 문장들 사이로 재현되는 행복했던 아버지를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아버지는 나로 인해 가장 많이 웃음 지었다는 것을. 나는 아버지가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었다는 것을. 한 달간 써 내려간 기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났다.
‘이젠 정말 괜찮아진 것 같다.’
12년이 걸렸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고 말하던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목소리가 남아있을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매달렸어야 했는데. 베란다에 앉아있던 아버지 곁에 다가가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가슴에 묻기까지 이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2013년 겨울, 사십구재 날 밤 아버지는 내 꿈에 찾아오셨다. 모두가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과자 한 접시가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과자가 멀어 먹을 수 없다고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며 내 앞으로 접시를 옮겨 놓아주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평생 그런 모습이었다. 당신의 몸을 굽혀 가져다주던 접시 위에는 과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왜 하필 내가 이토록 무거운 상실을 짊어져야 했는지 세상을 원망하던 날들이 있었다. 애써 이겨내지 않아도 되고 애써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되는 사연 없는 인생들이 미치도록 부럽고 밉기까지 했다. 여전히 나는 다정한 아버지와 딸을 보면 서글퍼지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의 결핍은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 내가 받은 사랑의 크기만큼 결핍도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기에 나는 결코 이 결핍을 이겨낼 수 없다. 그것은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니까. 대신 결핍을 기꺼이 껴안고 살아갈 뿐이다.
. . .
눈을 감는다. 아버지는 오늘도 베란다 의자에 앉아 말없이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곁에 다가가서는 익숙한 듯 바닥에 앉는다. 어제보다 더 마른듯한 손을 두 손으로 꽉 잡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빠, 우리 오늘은 무슨 이야기 나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