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모리 Sep 30. 2022

엉엉 울며 부지런한 한국인, 토론토 첫 번째 밤과 낮

주간 토마토 - 토론토에서 맞이하는 토요일 아침

"늦기는 했으나 자신은 만만"


서울 김환기 미술관 전시에서 본 문장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늘 만만한 내게 착 달라붙었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도 마찬가지였다. 비행기 타는 순간까지도 자신 만만했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겠지.


비행기 옆자리에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탔다. 내게 뜬금 말을 건다. 지금 몇 시예요?부터. 캐나다 처음 가세요? 몇 살이에요? 왜 가요? 하잘 가벼운 스몰 토킹인데 문제는 영어였고 나는 얼어버렸다. 제발 조용히 가자. 잘 터지지도 않는 핸드폰만 열심히 봤다. 스몰 토킹도 잘 못하는데, 캐나다에서 잘 살 수 있을까? 1년을? 한국에 있는 사람과 익숙한 것들이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자꾸 울음이 나왔다. 옆에 앉은 베트남 학생한테 들키면 창피하니까, 고개를 틀고 그것마저 서러워 엉엉 울었다.


입국심사는 간단했다. 앞에 줄 섰던 한국인은 계좌에 얼마 있냐, 무슨 일 할 거냐 꼬치꼬치 물어보던데, 나는 여권과 워크퍼밋만 확인하더니 바로 패스였다. 우버를 부르고 예약해둔 에어비앤비 숙소로 가면서 쌓인 카톡과 인스타 디엠과 메일을 확인했다. '코로나 랜덤 테스트 대상입니다.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세요'...


설렘이고 나발이고 짜증이 확 났다. 짐은 무겁고, 체크인 시간은 한참이고. 숙소에 짐 먼저 맡긴 후 카페로 가서 메일에 안내된 링크대로 회원가입을 하고 정보를 입력하고 근처 약국을 찾고 예약해서 찾아갔다-. 이렇게 한 줄로 정리되는 게 허탈할 정도다. 구글 번역기 만세.


토론토 covid 19 test drug market

다행히 숙소 근처인 토론토 다운타운에 검사할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눈물 날 정도로 찌르던데, 여기는 잇몸이랑 코만 깔짝 거리고 끝났다. 뭐 더 할거 있나요? 아니요 그냥 가시면 됩니다. 땡큐!


맥주 한 캔에 약 5,000원, 브리또 10,000원. 물가가 비싸긴 하구나. 나는 브리또 주문도 못하는 바보구나. 가족들과 친구들의 걱정을 먹고살며 숙소에 돌아왔다. 숙소 가는 길에 네이키드 보이(다 벗고 천만 두르고 있음)와 대마와, 마약과, 노숙자와, 노상방뇨와, 엉덩이를 봤다. 알고 보니 내 숙소는 우범지역이었다. 자신은 만만. 저녁 여섯 시에 기절하듯 잠들었다.


둘째 날. 9월 29일

새벽 세시에 일어났다. 시차 적응에 실패했다. 울다 자고 일어나서 울어서 얼굴이 부었다. 주섬주섬 나가야 한다. 캐나다 워홀로 일을 구하려면 SIN 넘버가 있어야 한다. 사회보장 번호라는데, 일종의 주민등록번호 같다. k-행정과 다르게 줄이 엄청 길고 오래 걸린다고 하여 아침 7시에 나왔다. 3km 정도 걸어서 service canada에 도착했다. 앞에는 3명이 줄을 서 있었다.

부모님 성함만 물어보고 별 어려울 것 없이 금방 끝났다. 나올 때 가드가 헤이! 하더니 뭐라 뭐라 했다. 농담인 것 같은데 하나도 못 알아들어서 머쓱하게 웃으면서 어쩔 줄 몰라하다 나왔다. 가는 길에 또 울컥했다. 농담도 못 알아들으면서 뭔 1년을 살겠다고.. 그러면서 계좌 개설을 위해 TD bank 2시 예약을 잡았다. 캐나다는 예약을 좋아한다. 만남은 무조건 예약제다.

https://www.td.com/ca/en/personal-banking/book-appointment/

Td 은행으로 한 이유: 현재 (2022-09-28, 뉴비에게 1년 계좌 유지비 면제, 아마존 300$ 프로모션 진행 중)

토론토 구시청 앞에 있는 TD bank

토론토에는 휠체어도 많이 다니고 자전거도 많다. 반려견도 많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 가게 입구에 퀴어 상징인 무지개도 많이 보인다. 모든 음식에는 칼로리 정보가 있다. 나는 추운데 반팔부터 패딩까지 난리가 났다. 토론토 대중교통은 TTC인데, 현지 한국인들은 '탈 테면 타봐라 시발'이라고 부른다고. 나는 걸어 다녔다.



많이 돌아다닐 거라 추리닝을 입고 갔는데 은행이 너무 고급져서 당황했다. 가죽자켓 새로 샀는데 입고 올걸. 데스크 직원은 역시나 내 이름인 경지를 발음하지 못했고, 내 발음도 못 알아들었다. 안내를 받고 갔는데 프라이빗 룸에서 상담이 진행됐다. 이런 건.. 돈 많은 VIP만 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그저 뉴비인데.


계좌 개설은 1시간이 걸렸다. 담당인 Mehdi는 일부러 말도 천천히 해준 것 같고 엄청엄청 친절했다. 사실 다 못 알아 들었는데 k눈치로 퍼펙트, 댓츠 올, 땡큐 거리면서 알아들은 척했다. 캐나다 언제 온 거냐고 물어봐서 어제 왔다고 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혹시 SIN 넘버 있어?

응 있어 여기.

너.. 어제 왔다고 했잖아. 벌써 만들었어?

응.. 오늘 아침에..

와 대단한데, 보통 2~3주 지나서 받던데!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가 보다. 한국인은 기다리지 않는다. 처리할 일이 있으면 해야 한다. SIN 넘버도 받고, 계좌도 개설하고, 데빗카드(체크카드)도 만들고, 캐나다 핸드폰 요금 자동이체 설정해두고, 캐나다 계좌에 해외송금 무료로 할 수 있는 어플(와이어베일리) 가입해서 송금하고, 캐나다 YMCA 가입해서 뉴비 전용 프로그램 신청도 했다. 울 틈도 없다. 자신은 만만.


이제 집을 구해야 한다. 시차적응은 아직도 안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에서 캐나다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