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정체기에는 철학을 해야 한다
3년 넘게 꾸준히 책을 읽었다. 2년 전부터는 독후활동을, 6개월 전부터는 내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책을 읽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느껴졌다. 책을 읽을수록 오히려 속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채워지는 듯하다가 금방 새어나가고,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감각만 남았다.
자기 계발서, 소설, 에세이, 명리학, 지혜서… 장르는 달라도 글을 덮을 때마다 남는 건 묘한 갈증뿐이었다. 나는 분명히 뭔가를 찾고 있었지만, 무엇을 찾는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책이 그렇듯 「탁월한 사유의 시선」도 알고리즘에 의해 읽게 되었다. 기억하자. 알고리즘이 우리 생활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물론, 알고리즘이 많은 책을 나에게 보여줬지만 내가 이 책을 선택했다. 내가 이 책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최진석 교수님이 2017년 펴낸 책으로, 2015년 건명원에서 한 5회의 철학 강의를 묶은 것이다. 철학은 무엇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직접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해놓은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가치관뿐 아니라 삶 전체가 종속되며,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방향성을 상실하고 만다. 즉 철학이란 스스로 삶의 격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 한마디로 사유의 시선을 갖는 것이다. (책 중에서)
“꿀 먹은 벙어리” 꿀이 너무 맛있어서 입을 열지 못했다는 말이다. 보통 할 말이 없거나, 염치가 없거나, 말을 할 수 있지만 말을 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말일 테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은 나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 책이다.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져서 말을 못 하게 되었고, 겨우 책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마치 그 책의 생각이 내 것이라도 되는 마냥 떠들어대던 게 부끄럽고 염치없어서 말을 못 하게 되었다.
타고난 기질이 울퉁불퉁하다. 마음이 곧지 않고 비틀어져 있다. 자기 합리화는 얼마나 심한지 나에게 바다같이 넓은 것이 타인에게는 바늘귀보다도 좁다. 처음에는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 보통의 지식과 고도의 정보가 없었고, 마음의 여유와 타인의 배려가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채워지는 것보다 내가 부족한 게 더 많다는 걸 깨달았고, 곳간을 채우듯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편독의 습관이 그러하듯 다양한 책을 읽지 않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장르로 독서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마음의 위로를, 공감을, 내면의 치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책은 나를 안팎으로 감싸 안으며 내가 나아갈 수 있게 나를 지탱하고 있다. 본래 사람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람이 들어올 자리에 책을 앉혀놓은 형국이다. 그 덕분에 속이 덜 시끄럽다. 책과 함께하는 매일 유익하다.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하다.
지금은 타고난 대로 살고 싶지 않아서 책을 읽는다. 체질 개선이라고 해두자. 마음이 온화해졌으면 좋겠다. 앎(지식)이, 지혜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말하기보다 경청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가족보다 나를 먼저 세우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자신이 만든 기준으로 자기 삶을 인도해라.”
책은 그 책을 쓴 사람의 기준이다. 나라는 사람은 마치 ‘편집 SHOP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이 정해놓은 기준을 편집해서 나를 채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이 싫어서 혹은 어려워서 남들이 생각해 놓은 것을 빌리는 거다. ‘내 마음이 왜 이러죠? 누가 내 마음 좀 읽어주세요’하며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내 마음을 대변해 줄 책을 찾아 서점을 떠돌아다닌다. 빌려 쓰다가 더 마음에 드는 기준이 나타나면 쉽게 바꿔버리면 그만이다. 참으로 가볍지 않을 수 없다. 마흔이 넘으면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나도 깊이가 있으면 좋겠다, 흔들리지 않는 나의 기준이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취향이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무언가가….’ 흔들리지 않는 40대를 불혹이라고 했던가. 다 옛말이다.
뭔가 부족해,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갈증은 두 해가 지나도 해소되지 않았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걸까? 갈증은 더 많은 책을 끌어당겼다. 목마른 사람이 계속 우물을 파다가 드디어 물을 만났다. 바로 철학이다. 철학이란 지혜의 학문이다. 지혜는 사람의 인격에서 나오며 호기심과 창의성으로 발현된다. 철학을 생산하는 자들은 세계를 사유한다. 사유를 사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가 책을 읽는 행위를 위의 내용으로 빗대어보면 나는 책을 통해 타인의 사유를 사유했다. 나의 세계를 직접 사유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사유를 내 세계에 가져다 컨트롤+C / 컨트롤+V (복사, 붙여 넣기)를 하고 있었다. 더 솔직해지자. 나는, 내가 내 세계를 직접 사유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철학 : 가장 높은 수준의 생각을 한다. 즉, 사유한다.
내가 그동안 했던 생각은 잡념(여러 가지 잡스러운 생각)이다.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생각은 사유(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이다.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다는데 지금은 철학을 만날 때입니다.
파랑새 이야기를 아는가? 행복을 주는 파랑새를 찾아 떠났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토록 찾던 파랑새가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왜 더 갈증이 났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삶에 대해 알고 싶었으면 나에게 물어볼 일이지, 책을 통해 타인이 하는 말만 계속 쫓고 있었으니 우물현답이다. 다행히도 그 와중에 수많은 책이 나에게 현명한 대답을 해주었구나.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P.118)
철학의 생산은 사유의 독립이라고 했다. 그동안 타인의 사유에 의탁해 살았으니, 이제부터 과거는 끊어내고 내 세계에 집중해서 사유하는 것을 훈련해 보려고 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읽고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그것에 답을 해보는 형태로 일단, 사유를 시도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래, 지금부터 사유하겠어.’ 마음먹는다고 사유가 그리 쉽게 되지는 않을 터다. 사유도 연습이 필요하다.
철학 생산자들은 모두 시대와 세계에 예민한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다.
선진국가가 되는 길 “인격을 바탕으로 높은 시선에서 시대와 세계의 흐름을 포착하고 지혜를 제시하는 것이 철학이고, 철학적 사고를 할 때라야 선진이 가능하다.”
: 철학적 시선의 높이에서 주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삶을 끌고 가라.
철학적 사고를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사랑하는 나의 아이들이다. 학자나 교수님들이 후학양성에 사명감을 느끼듯이, 부모인 나는 자녀 양육에 사명감을 느낀다. 자녀를 낳아 키운다는 것이야말로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일이다. 내가 바로 서야 내 자녀들도 바로 선 삶을 살 것이다.
철학적 사고는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시대 의식을 포착하고 거기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지식인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서야 내 가정이 바로 서고, 내 가정이 바로 서야 내 나라가 바로 선다.’ 이 나라가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선도할 수 있는 지식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인재는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가정에서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일단 우리나라 교육제도가 시대와 세계에 예민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정해놓은 답을 강제하는 교육, 정해놓은 꿈을 강요하는 교육, 정해놓은 길을 권유하는 교육이 현재의 대한민국이다. 정해진 틀 안에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안에서는 지식인이 나올 수 없다.
거대한 것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바로 세우기 전에 내 가정이 바로 서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자녀들이 정해놓은 틀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삶을 끌고 가기를 바랄 뿐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생각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러하여야 한다.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 개인적 차원에서 장르는 ‘꿈’이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 고유한 자신으로 꿈이 있느냐 없느냐가 선진성과 독립성의 여부를 보여준다.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산다.
꿈에 대한 잘못된 공식 : 꿈은 직업이다. 나의 어릴 적 꿈은 프로그램 개발자. 나 역시 직업을 꿈으로 가지고 있었다. 꿈을 이루었냐는 질문 대신 직업을 이루었냐고 물어야겠다. 대답은 YES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지원받아 운영하는 교육사업을 올해로 12년 차 운영 중이다. 꿈을 이루었냐고 질문을 바꿔보자. 대답은 NO다.
나의 꿈 : 꿈이 이루어진 하루를 상상하며
‘이른 아침이 되면 동쪽 창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햇살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이리저리 몇 번 뒤척이다 일어나 앉아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어준다. 주방으로 가 따뜻한 소금물에 가글 한 번, 따뜻한 물을 다시 받아 밤새 빈 속을 달래듯 천천히 마시기. 서재로 가서 경제 공부 1시간(밤사이 미국 시장은 안녕하셨나요?), 8시 정도가 되면 남편이 잠에서 깨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우린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며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아침은 채소 육수에 제철 채소를 다져 넣은 죽으로 하자. 내가 죽을 끓이는 동안 남편은 과일 몇 가지를 깎아 두고 아이들에게 아침 안부를 묻는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은 한 우리는 아이들의 답장을 천천히 기다린다. 식사하며 서로의 스케줄을 공유한다. 저녁 메뉴도 미리 정해둔다.
나는 강의와 글쓰기가 주업이다. 요즘은 탄소중립과 관련된 강의 요청이 많아 주 4회 정도 출강을 나가고, 그 외의 시간은 글을 쓴다. 산문 3편, 에세이 2편 출판된 책이 있는 전업 작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중년의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한 번 써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은 교육이 없는 날이라 온종일 집에 있을 거다. 서재에서 글을 쓰다, 마당에 나와 책을 읽다,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일을 조금 하고 다시 글을 쓸 것이다. 오후 6시 남편의 퇴근 시간이다. 밥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채소와 과일 조금을 꺼내어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고, 못다 한 집안일을 함께 정리한다. 움직이기 싫은 시간이 도래하기 전 우린 벌떡 일어나 운동해야 한다. 운동이라고 해봤자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도는 일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5km 달리기는 남편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남편에게만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이 꾸준함이다.
서로 부족한 것들을 채워주며 우린 그렇게 평생을 함께할 거다. 저녁이 너무 늦기 전 책상에 앉아 기록을 시작한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고, 내일 하루를 준비하는 기록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수용하는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내가 너무 많은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다. 많은 계획보다는 많은 실행을 한다. 최선을 다해 실행하고 결과는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그게 내가 삶을 사는 방식이다. 어쩌나, 밤이 늦었다. 먼저 누워 있는 남편 옆으로 들어가 눕는다. 요즘 제법 날씨가 추워져 밤마다 남편은 화목보일러에 불을 땐다. 남편의 머리카락 사이로 불 향이 남아 있다. 겨울이 깊어져 가는 냄새다. 오늘 하루 잘 살았습니다. 그럼 내일도 잘 부탁드려요.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고 사랑하는 남편 옆에서 잠을 청한다.’
내 꿈은 시대와 세계를 놓치지 않고 계속 공부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강사와 전업 작가라는 직업을 통해 이 꿈이 나만의 꿈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에게 연결되어 긍정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 꿈이 나의 장르이다. 누군가 나의 삶을 동감한다면 어쩌면 나의 장르가 그 사람의 삶을 선도할 수도.
「탁월한 사유의 시선」에서 꿈에 관한 내용 몇 가지를 발췌했다. 나만 알기에는 아까운 내용이다. 온 국민이, 특히 미래세대들이 이 이야기를 가슴에 새기고 성장한다면 미래세대들의 미래가,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게 떠오를 것이다.
- 꿈과 이상이 있으면 그 꿈과 이상을 실천하고 시도하면 되는 것이지, 그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 이미 있는 논리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따지거나 분석하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오겠는가?
- 현재의 틀로 미래를 재단하면 미래가 제대로 열리겠는가?
- 꿈을 꾸는 사람이 현재의 문법에 갇혀 있으면 꿈은 항상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꿈꾸는 일을 멈춰버리는 얌전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 안전을 추구하기만 하고, 낙오되지 않으려고만 하고, 실패를 두려워한다.
- 꿈은 불가능의 냄새가 더 강하게 나야 진정한 꿈일 가능성이 크다.
-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꿈이다. 가능해 보이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괜찮은 계획일 뿐이다.
- 꿈을 꾸거나 꿈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우선 무모해야 한다. 무모함을 감당할 배짱이 없이는 꿈을 꿀 수 없다. 결국은 용기다.
- 꿈은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
- 꿈을 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이다.
(P.154-155)
“나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꿈이 없는 삶은 빈 껍데기일 뿐이다. (P.157)
유독 엄마에 대한 기대가 컸다. 환경을 탓하기에는 나와 다르게 두 자매는 엄마 탓이라는 걸 하지를 않았다. 지금은 조금 덜하지만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탓을 했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부끄럽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엄마에 대한 결핍을 나만 유별나게 느끼며 컸다. ‘유난하다, 유별나다’ 유년기에 자주 듣던 말이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기에,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본능이었다. 그렇게 나도 엄마가 되었고, 엄마에 대한 나의 결핍은 ‘엄마의 역할’에 지독한 집착을 낳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일하느라 바빠서 엄마의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죄책감 속에서 살았다. 시간이 흘러 사업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경제적으로, 시간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는 과할 정도로 엄마의 역할을 쏟아내고 있다. 어릴 적 내가 엄마에게 가졌던 기대를 우리 아이들에게 투영해, 마치 어린 나에게 내가 엄마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굴고 있다.
나의 이런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고 생각했다. ‘이게 맞나?’ 내가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해 본다. 답을 알면서 질문을 하는 것은 그 답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 마지막 부분에 ‘자유롭기와 가족과의 조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지점에 대하여 나는 어떤 사유를 할 수 있을까? 과거에 사로잡혀 과도한 엄마 역할의 프레임이 갇혀 있는 내 모습을 객관화하고, 옳지 않은 행동은 멈추자. 그 집착을 멈출 때, 비로소 나도 자유로워지고 아이들도 스스로의 기준을 세울 수 있다. 철학은 나를 자유롭게 하고, 자유로운 나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편한 마음으로 나이를 먹어야겠다. 무엇을 찾아 헤매었는지 이제 알았으니 어쩌면 50에는 불혹을 이룰지도 모르겠다. 정체기라 생각했던 시간이 사유의 시작점이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첫걸음을 떼는 아이처럼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한다.
타인의 사유를 빌려 사는 삶을 내려놓고 이제부터는 내 삶을, 내 세계를, 내 질문을 중심에 두고 ‘나의 사유’를 시작한다. 내 아이들이 정해놓은 정답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시대와 세계를 주체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꿈과 장르를 만들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나는 오늘도 사유를 연습한다. 내 아이들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먼저 내가 사유하는 부모로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남겨줄 단 하나의 철학,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