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가시화

돌봄 헌법

by 감자부침


한국은 가족의 비공식 복지가 국가의 공식적 복지에 비해 활성화되어 있다. 공동체의 유지와 효 문화의 존속 등의 원인으로, 가족에 의해 제공되는 복지의 규모가 상당하다. 부모세대의 사적 이전소득 수혜 비중이 큰 것이 대표적인 모습인데, 이러한 가족 간의 비공식 복지가 활성화된 환경에서는, 국가복지에 대한 시민의 의식과 요구 수준이 낮기 때문에 정책결정자들이 국가복지정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악순환이 발생한다.5 우리나라의 ‘낮은 부담-낮은 복지’ 구조는 포퓰리즘의 발현이다. 수혜를 보는 이익집단이 소수이면서 포퓰리즘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 복지정책은 그 반대이다. 제대로 시행이 되면 다수의 수혜자를 낳지만, 정책결정자들은 선뜻 실행에 옮기지 않는다. 즉, 해야 할 정책을 재정규모의 증가 등을 이유로 국민의 눈치를 보다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복지지출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복지 증가의 혜택보다는 부담 증가(가처분소득 축소)의 비용이 더 크게 느껴지고, 복지의 특성상 부담자와 혜택자가 완벽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실효적인 결정을 하지 못한다.6


이러한 한국사회의 풍조를 고려하면, 돌봄 역시 비공식적 영역에 놓여있음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공적영역 혹은 사적영역의 돌봄 서비스 제공이 활발하지만, 돌봄을 공식화하는 것은 별개이다. 돌봄 노동에 대한 화폐적 보상과 관계없이 돌봄 노동이 사회적 인정범위에 포함되어 가시화되는 것을 ‘돌봄의 가시화’라고 하는데, 이는 사회적 돌봄으로의 전일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의 사회적 책임을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분담하는 돌봄 사회 논의의 장을 마련함을 의미한다.7 적절한 갈등이 당사자와 그들이 소속된 조직에 유익한 긴장감을 주듯, 수면 위로 올려 상황을 직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성과도출에 유리하다. 같은 맥락에서, 돌봄의 가시화는 그 가치를 둘러싼 불만과 요구를 답보상태에 두지 않고 모두가 직면하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돌봄의 가시화 방안으로 돌봄 헌법을 제안한다.




돌봄 헌법은 돌봄을 국가가 책임지고 수호해야 할 가치이자 국민의 의무로 본다. 헌법에 명기함으로 써, 돌봄 부담을 타자화 및 편중화하지 않고, 더 이상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지 못하도록 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편, 국가 최고규범인 헌법에 새로운 가치를 명문화하는 문제는 간단치 않기 때문에, 돌봄이 헌법적 가치로서 편입가능한 근거와 그 실익을 검토해 본다.


헌법의 개념

헌법은 국가존립을 위해 정립되어야 할 국가권력의 창설·배분과 국가와 국민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기본원칙들을 규율함으로써 국가 법질서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본규범이다.8 사회영역을 포함해 국가 공동체 전체의 근본질서와 가치를 천명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생활이나 사적 영역의 문제일지라도 법질서와 결부되는 한 헌법의 보호를 받거나 헌법에 의해 규제된다.9 개인적이고 가족적인 문제로 취급되어 왔던 돌봄을 기본규범에 명기하게 되면, 관련 문제와 정책에 관한 공론화의 법적 당위성을 얻기 유리할 것이다. 게다가, 공적영역으로의 편입에 시차가 발생하더라도, 법질서와 관련되는 사적영역의 문제로 다루어질 수 있다.


헌법의 규범적 특성: 개방성·정치성

헌법은 역사적, 시대적으로 승인된 가치와 정신들을 포함하고, 이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여 보존 및 유지하는데, 헌법의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헌법의 의미와 내용의 시간적·역사적 변화와 발전이 허용되고, 이에 따라 이데올로기나 가치, 이익의 변화를 탄력적으로 수용한다.10 한편, 헌법의 제·개정 절차와 그 역사를 생각했을 때, 헌법은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서 당대 정치현실을 반영한다. 타자화되었던 돌봄이라는 가치가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책무라는 학계의 논의가 활발해지고, 해당 안건에 관하여 사회적 합의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할 필요가 있을 때, 헌법은 일차적인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헌법에서의 돌봄 가치·돌봄 국가원리 도출 근거

돌봄은 돌봄 객체의 존속에 대한 돌봄 주체의 힘의 우위라는 역학관계를 내포하는데, 이러한 힘의 불균형은 법의 관점에서 의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이재홍, 2024). 의무는 그 이행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이행가능성이란 곧 의무이행 주체에게는 의무를 이행할 힘이 있지만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없다는 점, 그리고 의무이행의 상대방은 의무의 이행으로 인해 이익을 얻는데 이때 이익은 개체의 유지·존속의 증진에 기여하는 점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이재홍, 2024). 돌봄 제공을 의무화할 수 있다면, 돌봄 수혜는 권리가 될 수 있다. 법적인 틀안에 돌봄 관계의 비대칭성이 포섭되었을 때 헌법적 가치로서의 돌봄이 탄생한다.




한편, 돌봄을 개인과 사회에 필수적인 가치임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 가치에 걸맞은 정치·사회·경제 적 대우를 하는 돌봄 국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돌봄 가치의 명문화에서 나아가, 헌법원리로써의 ‘돌 봄국가원리’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헌법원리는 구체적인 헌법규정으로부터 도출할 수도 있고, 상위의 헌법원리로부터 도출할 수도 있기 때문에11, ‘돌봄 가치’의 조문화가 선행되어야겠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인격 존중·실현 체계의 기초와 윤곽을 형성하는 지도적·총괄적 의미와 성격을 가진 가치이자 기본권으로서, 모든 국가작용을 구속하고, 국가는 이를 보호해야 할 객관적 의무를 부담한다.12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헌법 제10조는 헌법의 개방조항(제37조 제1항)과 결합하여 다양한 기본권을 도출할 수 있는 창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은 정의하기 어려우나, 존엄을 침해하는 것은 비교적 구별하기 쉽다. 예컨대, 친절한 농장주인이 있다고 해보자. 그가 노예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그리 심한 감시와 통제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면 그 노예는 인간으로서 존엄할까. 노예라 함은 결국 한 인격체를 수단화한 것이다. 한 개인을 국가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단순히 수단이나 객체로 전락시키는 것은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객체설’13에 따르면 노예 제도는 전형적인 예시가 된다.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건과 다를 바 없이 소유주의 재산으로 취급되고, 그의 안위는 언제고 주인의 선의에 달려있다. 개인의 선택이랄 것이 없이 예속상태에 머무르는 노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누리지 못하는 개인이다. 활동범위에 대한 자유를 비롯해, 넓은 의미의 신체의 자유이자, 자신의 생명에 대한 지배권 행사에 대한 자유도 인간존엄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명을 하는 개인의 선택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인격적 자기 결정권의 행사 측면에서 보호받는다.14


한편, 사회권적 기본권의 측면에서 인간다운 생활15을 할 수 있도록 최저생계를 보장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는데, 이 또한 존엄한 인간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함이다. 자유주의에서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동물과 구별되는 선험적 주체로서, 이로부터 인간존엄성이 도출된다. 그리하여 선험적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것을 인간존엄성의 실현으로 보지만, 돌봄의 가치를 결합하면 범위가 확대된다. 물론, 인간은 합리적이고 자족적일 수 있다. 이미 돌봄을 받고 무탈하게 성인이 된 개인이 그러하다. 생로병사로부터 초탈한 인간은 있을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돌봄과 의존을 경험한다. 돌봄을 타자화하고 온정주의로 대상화하는 것은 편협한 허상이다. 국가는 취약한 개인을 상정하고, 어떠한 개인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저버릴 정도로 궁핍하여 예속상태를 부득불 선택하지 않도록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 실질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곧 존엄한 인격성 보호인 것이다.



사회국가원리

사회국가는 생존 기반의 보호와 필수적 생활수요를 해결하고, 사회적 위험을 분담하며, 실질적 기회의 균등을 추구한다. 생존과 생활의 위험 부담은 돌봄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돌봄 관계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힘의 불균형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정치적 불평등으로까지 이어진다. 실질적 기회균등의 달성을 위해서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할 필요가 있고, 이는 돌봄의 가치를 공식화함으로써 가능하다.


한편, 사회국가원리가 돌봄 국가원리의 도출 근거 중 하나인 것은 맞지만, 사회국가원리의 하위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회국가원리는 자유 실현의 실질적 조건을 경제적 조건으로 국한시키고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돌봄 국가원리는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 발생하는 돌봄 의무를 인정하고,돌봄 객체를 힘의 불균형이 인정되는 모든 대상16으로 확장한다(이재홍, 2024). 즉, 실질적 조건이 갖추어진 정상 상태를 벗어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시혜적 조치가 아니라, 결핍과 의존이 인간 및 비인간의 근본적 특성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노력을 통해 보완해 나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이러한 차이는 돌봄 국가원리로부터 환경권과 미래세대의 기본권을 도출할 수 있다는 논리적 귀결을 가져온다. 환경권이나 미래세대의 기본권은 인간이라는 권리주체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서 기본권의 지위를 가진다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데, 인간의 이익과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거나 그 입증이 불가능한 자연환경은 그 보호범위에서 벗어난다는 중대한 한계를 가진다(이재홍, 2024). 그러나 만약 돌봄 국가원리를 헌법원리로 인정한다면, 인간의 이익과 더불어 자연보호, 미래세대의 존속·번영에까지 보호법익이 확장될 수 있는 것이어서 한계 보완이 가능하다.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돌봄이 자연보호와 인류의 존속에 대한 국가적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가치임이 법리적 실익으로 확인된다.



민주주의원리

헌법 제1조 제1항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가형태를 민주공화국이라고 천명한다. 우선, 공화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공화주의17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공화주의는 자유주의 및 공동체주의와 차이를 보인다. 일명, ‘비지배 자유’라고 불리는 공화주의적 자유는 국가의 단순한 불간섭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공화주의가 말하는 지배의 개념은 보다 복잡한데, 나의 선택에 타인의 위력이 가해질 가능성이 있거나, 타인의 자의적 의지가 곧 나의 의지가 될 우려가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상태의 완전한 배제가 바로 비지배이고, 사적 형태인 주종적 지배의 부존재가 공화주의에서의 자유이다. 일종의 위계관계에 나의 안위가 달려있는 것이 예속의 대표적인 경우인데, 이는 돌봄의 관계 비대칭성과 밀접하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돌봄 객체는 돌봄 제공자인 돌봄 주체의 선의와 선택에 의존한다. 취약한 개인을 보살피기로 응답(response)하고 책임(responsibility)을 지는 돌봄 제공자는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지기 때문에 그를 돌보는 제3자(조달자)의 선의에 그의 존속이 달려있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해진 개인은 결국 고착화된 사회경제의 위계질서 속에 편입되고, 이는 정치적 불평등을 낳는다. 정치적 불평등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를 가속하고 이는 돌봄불평등의 악순환이 된다. 비지배 자유의 실현은 민주공화국의 근원적 특질이므로, 이를 위해 국가가 나서는 것은 헌법원리에 부합한다.


한편, 비지배 자유의 보장은 공화주의적 평등으로 이어진다. 모든 시민들에게 존엄과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인 실질의 조건들을 보장하는 것이 공화국의 의무이고(Maurizio Viroli), 이러한 보장으로부터 평등이 실현된다.










5 이신용, 2021. ‘한국의 비공식 복지는 한국적 복지모형?’, 한국사회복지학 서평.

6 김태일, 『국가는 내 돈을 어떻게 쓰는가』, 웅진지식하우스, 2013, p.140.

7 op.cit. 석재은-“돌봄 정의(Caring Justice) 개념구성과 한국장기요양정책의 평가” p.158.

8 김하열, 『헌법강의』, 박영사, 2022, p.5.

9 Ibid. p.6.

10 Ibid. p.17.

11 문화국가원리와 같이 헌법재판소의 판례 법리로 헌법원리가 도출되기도 한다(헌재 2004. 5. 27. 2003 헌가 1등).

12 Ibid. p.299.

13 BVerfGE 9, 89(95); 50, 125(133); 96, 375(399f).

14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15 헌법 제34조 ①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16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 미래세대

17 공화주의 정치사상의 공통적인 핵심요소로는, 1) 자유라는 철학적 이상, 혼합정체라는 헌정적 이 상, 시민적 관여라는 민주적 이상, 2) 법과 공동선에 기반을 두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정치 공동체인 공화국, 다른 사람의 자의에 종속되지 않을 자유 그리고 일상의 권리과 정치적 권리의 평 등, 시민적 덕성이 제시된다(김하열, 2022).

매거진의 이전글Unsung H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