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이야기
세상에는 끝내 붙잡히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손을 뻗어도 무엇인가를 잡았다는 감각이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해합니다. 보이지 않으면 없는 것 같고, 붙잡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노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진실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니 희라 하며,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미라 한다.”
도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귀에 걸리지 않으며, 손아귀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묻고 따질 수도 없고,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섞여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로 남습니다. 그 위는 밝지도 않고, 그 아래는 어둡지도 않습니다. 밝음과 어둠 사이,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도는 조용히 흐릅니다.
노자는 이것을 ‘형상 없는 형상’, ‘실체 없는 모양’이라 부릅니다. 맞이해도 시작을 볼 수 없고, 따라가도 끝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지만 그 사이에서 삶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합니다.
“옛 도를 붙들어 지금의 일을 다스리면, 그 시작의 자취를 알 수 있다.”
도는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늘 흘러오던 길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흐름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주 확실한 것을 원합니다. 명확한 기준, 분명한 답,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 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보다 앞서 움직입니다. 이해보다 먼저 흔들리고, 설명보다 먼저 통과합니다. 도는 무엇이 ‘있는가’를 묻기보다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묻습니다. 정의가 아니라 방향이고, 소유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래서 도를 안다는 것은 붙잡는 일이 아니라 참여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안에
몸을 두는 일입니다.
신앙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분’이라 말합니다. 보이지 않기에 부재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기에 더 깊이 임재하시는 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
하나님은 눈앞의 증거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으십니다. 말씀과 사랑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보는 일이 아니라 기억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광야에서의 은혜, 십자가에서의 사랑, 부활의 약속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것.
노자가 말한 ‘옛 도를 붙든다’는 말은 신앙의 길에서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기억할 때, 우리는 지금의 삶 속에서도 그분의 손길을 알아봅니다.
성령은 붙잡히지 않지만 역사하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흐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시작도 끝도 확인할 수 없지만, 그 사이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조용히 배웁니다.
보이지 않음은 멈춤이 아닙니다. 결핍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이 우리 삶에 스며드는 실마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잡히지 않음 속에서 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