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일 수 없는
깊이에 대하여

첫 번째 이야기

by 이지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입니다. 이름이 생기면 사물은 경계를 얻고, 사람은 잠시 안도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순간부터 어떤 것들은 이미 설명 안에 갇히기 시작합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라고 부를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말로 붙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본래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노자가 말한 ‘도(道)’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길과는 다릅니다. 어디로 가야 할 방향이 아니라, 이미 모든 존재가 그 안에서 흘러가고 있는 움직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도는 이해되기보다 체험되고, 설명되기보다 살아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덕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름 없음은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 있음은 만물의 어머니다.”

노자는 세상의 근원을 ‘이름 없음’이라 부릅니다. 아직 구분되지 않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며, 아직 말로 정리되지 않은 자리입니다. 그로부터 형태와 질서를 가진 세계, 곧 ‘이름 있는 세계’가 태어납니다. 보이지 않는 근원이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 이해는 언제나 전체가 아니라 한 조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합니다.

“욕심이 없을 때 그 묘함을 보고, 욕심이 있을 때 그 경계를 본다.”

욕망이 많을수록 우리는 설명을 붙잡고, 설명이 많아질수록 근원에서 멀어집니다.

신앙도 비슷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싶어 하고,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셨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씀은 세상을 여셨지만, 하나님은 말씀보다 앞서 계셨습니다. 이해되기 전에 존재하셨고, 정의되기 전에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 앞에 고요히 서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말이 줄어들 때, 오히려 더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설명이 멈출 때, 비로소 들리는 음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름으로 가두지 않는 신앙, 말로 소유하지 않는 믿음, 그 침묵 속에서 진리는 더 깊이 흐릅니다. 어쩌면 진리는 말해질 때보다 살아질 때 더 분명해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유의 한마디

진리는 이름을 넘어 흐릅니다. 하나님은 말보다 앞서 계십니다. 침묵은 이해보다 깊은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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