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선함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두 번째 이야기

by 이지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선을 지향하고, 옳음을 말하려 합니다. 그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름다움은 비교가 되고, 선함은 판단이 됩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아는 그때, 이미 추함이 생겨난다. 세상이 선을 선이라 아는 그때, 이미 선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역설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름다움과 선함이 왜 문제일까, 그것이 왜 그림자를 낳을까.

하지만 조금 더 살아보니 이 말이 점점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부르는 순간, 그 기준에서 밀려나는 것들이 생깁니다. ‘선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선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편에 놓입니다.

빛이 생기면 그림자가 함께 생기듯, 이 세상은 늘 짝을 이루며 존재합니다. 있음과 없음, 높음과 낮음, 길고 짧음, 앞과 뒤. 문제는 이 균형을 우리가 깨뜨릴 때 시작됩니다. 기준이 ‘나’가 되는 순간, 세상은 빠르게 시끄러워집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성인은 다투지 않고 이루며, 소유하지 않고 살리며, 공을 이루되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고. 이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라는 권면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옳음’에 머물고 싶어 합니다. 내가 맞다는 자리에 서 있고 싶고, 그 자리를 쉽게 내려놓지 못합니다.

성경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인간의 고통은 선과 악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입니다.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선악과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판단하고 싶었던 인간의 욕망을 드러냅니다. 그 이후 우리는 선을 규정하고, 악을 단정하며, 서로를 재단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선’은 인간이 세운 기준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성품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이 선함은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드러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사람을 세운다고.

지식은 구분을 만들고, 사랑은 관계를 만듭니다. 옳음은 선을 나누지만,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예수님의 길도 그랬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이루셨지만 그 자리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으며, 사랑으로 끝까지 흘러가셨습니다. 어쩌면 선과 악을 정확히 가르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를 살리는 편에 서 있는가일지도 모릅니다.

노자가 말한 무위의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판단을 내려놓는 삶처럼 보입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순간, 사랑은 자주 사라집니다. 그러나 기준을 내려놓을 때, 관계는 다시 살아납니다.


사유의 한마디

선과 악을 나누는 순간, 사랑은 자주 길을 잃습니다. 무위의 삶은 구분보다 관계를 택하는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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