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째 이야기
1996년에 발표된〈네모의 꿈〉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네모난 창문, 네모난 교실, 네모난 하루를 노래하며 왜 세상은 이렇게 각져 있는데 어른들은 둥글게 살라고 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 노래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배웁니다. 곧게 살아야 한다고, 한결같아야 옳다고, 굽은 길은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지만 인생은 한 번도 직선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돌아가야 할 때가 있고,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으며, 낮아져야만 비로소 보이는 길도 있습니다.
노자는 바로 그 지점에서 도의 진리를 발견합니다. 굽으면 온전해지고, 구부리면 곧게 된다고. 이 말은 세상의 논리로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로 향하는 선으로 그리지만, 노자는 아래로 휘는 길에서 완성을 봅니다. 그에게 도는 경쟁의 법칙이 아니라 상반되는 것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의 원리였습니다.
강은 곧을수록 얕아지고, 굽을수록 깊어집니다. 나무는 휘어질수록 바람을 견딥니다. 굽음은 부러짐이 아니라 살아남는 방식입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움푹 패이면 채워지고, 닳으면 새로워진다고. 적으면 얻게 되고, 많으면 오히려 혼란스러워진다고.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자기를 옳다 주장하지 않으며, 공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다투지 않기에 아무도 그와 다툴 수 없습니다.
굽는다는 것은 존재를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계를 위해 모서리를 내려놓는 일입니다. 모난 돌은 홀로 남지만, 깎인 돌은 함께 맞춰집니다. 굽는 사람만이 같이 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에게 굽음은 결핍이 아니라 완성의 과정입니다. 삶의 굽이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신호일 뿐입니다.
성경은 이 길을 한 인격 안에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위로 오르지 않고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 낮아짐 안에서 사랑은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고.
십자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장 굽은 자리입니다. 패배처럼 보이고, 무너진 것처럼 보이며, 더 내려갈 수 없는 바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낮추시되 버리지 않으시고, 굴복시키시되 다시 세우십니다. 그래서 굽음은 끝이 아닙니다. 온전함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지금 삶이 굽어 보인다면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 굽은 자리에서 생명은 여전히 자라고 있습니다.
굽음은 부러짐이 아니라 생명이 숨 쉬는 형태입니다.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사랑이 자라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은 굽은 길 위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