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을 있게 하는 길

스물한 번째 이야기

by 이지

“그냥 살아라.”

어릴 때는 그 말이 무책임하게 들렸습니다. 아무 계획도, 아무 기준도 없이 흘러가라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그 말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냥 산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자연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어 사는 일이었습니다.

노자는 아마 오늘의 세상을 보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성취를 좇지만 그 끝에는 공허가 남는다고.

사람들은 돈을 벌고, 이름을 남기고, 자리를 쌓으려 애씁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 머물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노자는 조용히 묻습니다. 그대가 붙잡은 것이 정말 영원한가?

노자가 말하는 ‘큰 덕’은 열심히 착해지는 태도가 아닙니다. 덕이란 무언가를 더 이루는 능력이 아니라, 도를 따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억지로 도를 붙잡지 않고, 도가 흐르는 자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 그것이 무위의 삶이며, 깊이 신뢰하는 삶입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큰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른다고. 그 도는 알 수 없습니다. 붙잡을 수 없고,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알 수 없음 속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희미하고 아득하지만 그 안에 형상이 있고, 어둡고 깊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노자는 이 알 수 없음 속에서 오히려 진실을 봅니다. 도는 보이지 않지만, 만물은 그 안에서 태어납니다. 감춰져 있지만, 모든 형상 속에 이미 스며 있습니다. 그 안에는 정기가 있고, 그 정기는 지극히 참되어 그 안에 신실함이 있습니다.

노자는 이 신실함을 믿음이라 부릅니다.설명의 결과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함.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보이지 않지만, 항상 거기 있었고, 모든 시작은 거기서 흘러나왔다고.

이 말은 하나의 고백입니다.나는 보지 못하지만, 모든 것은 거기서 왔다는 고백. 지식이 아니라 신뢰의 태도입니다.

성경은 이 고백을 다른 언어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노자가 도를 말할 때, 요한은 그 도를 인격으로 고백합니다. 보이지 않으나 만물을 있게 하는 근원,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노자가 말한 ‘그윽하지만 참된 정기’는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믿음의 실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해로 살지 않습니다. 순종으로 걷고, 설명보다 사랑으로 머뭅니다.

노자의 덕이 도를 따른 결과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듯, 그리스도인의 선행도 은혜를 따라 흐르는 열매입니다. 스스로를 덕스럽게 만들려 하기보다, 이미 우리 안에 심겨진 생명이 자라도록 내어 맡기는 일.

바울은 이 신비 앞에서 침묵합니다. 하나님의 길은 측량할 수 없고, 그 판단은 헤아릴 수 없다고. 그 침묵이 겸손이며, 그 겸손이 큰 덕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신실함은 변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모든 것을 있게 하는 길. 노자가 말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가장 깊은 신실함, 그곳에서 사랑은 다시 생명을 낳습니다.


사유의 한마디

보이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고, 붙잡히지 않지만 모든 것을 살리는 것. 우리는 그 신실함 위에 오늘도 조용히 서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배움을 넘어 살아 있음을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