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넘어 살아 있음을 배우다

스무 번째 이야기

by 이지

사람은 늘 배우려 합니다. 더 많이 알고, 더 정확히 이해하고, 더 나은 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 덕분에 세상은 분명 편리해졌습니다. 정보는 넘치고, 설명은 정교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더 불안해졌습니다.

노자는 이 지점에서 조용히 말합니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사라진다고.

이 말은 무지를 선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노자는 지식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지식이 권력이 되는 순간을 두려워했습니다. 배움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비교와 경쟁, 자격과 서열의 기준이 될 때, 그 배움은 도를 가리는 장막이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묻습니다.

공손한 말과 둘러대는 말의 차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선과 악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까.

그는 판단의 경계가 생각보다 훨씬 흐릿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명해지려 하기보다 고요해지려 했습니다.

세상은 늘 떠들썩합니다. 사람들은 웃고, 성취를 자랑하고, 마치 큰 잔치에 참여한 것처럼 봄날 누대에 오른 것처럼 들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노자는 홀로 앉아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마치 아직 옹알거릴 줄도 모르는 아기처럼. 돌아갈 곳을 모르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모두 넘쳐 보이는데, 자기만 비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부릅니다. 나는 바보의 마음을 가졌다고. 세상은 밝고 또렷한데, 자기만 어둡고 막막하다고.

그러나 노자는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사람들과 달리 나는 ‘어머니를 먹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살아 있음을 다시 느끼는 것. 그에게 도는 얼마나 아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하게 살아 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배움보다 존재를 택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길을 걸으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모든 조항을 알고 있었지만, 진리는 그들 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입술로는 공경하지만 마음은 멀다고.

배움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때는 복이 되지만, 하나님을 대신하는 기준이 될 때는 우상이 됩니다.

노자의 ‘절학무우’는 지식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라, 지식의 자리를 되돌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언어로 들으면 이렇게 들립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나님의 나라는 설명으로 열리지 않습니다. 논문으로 증명되지도 않습니다. 그 나라는 고요한 마음, 사랑의 실천, 살아 있는 관계 속에서 조용히 임합니다. 제자들이 때와 방법을 물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그분이 발을 씻기신 것도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치신 사랑이었습니다. 배움을 넘어 살아 있음을 배우는 것. 아는 것을 늘리기보다 존재를 회복하는 것.

노자와 예수가 같은 자리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사유의 한마디

배움을 끊는다는 것은 무지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시 아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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