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주절
의사들은 늘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말한다.
듣는 입장에서는 괜히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태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람은 고통 자체보다
고통이 어디까지 갈지 모르는 상태에서 더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묻게 된다.
이 상황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감당해야 할 선은 어디쯤인지.
최악을 상정하는 태도는
삶을 비관하려는 마음이라기보다,
고통을 정리 가능한 범위 안에 두려는 시도에 가깝다.
이름 붙여지지 않은 고통은 막연한 공포가 되지만,
범위가 주어진 고통은 준비의 대상이 된다.
공포는 사람을 얼어붙게 만들고, 고난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서 최악을 생각하는 일은 무너지기 위한 상상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태도에 더 가깝다.
그런데 대비만으로는 삶을 건너갈 수 없는 순간도 있다.
두려움은 피할수록 커지고, 어둠은 외면할수록 깊어진다.
어떤 상황에서는 차라리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가장 빠른 선택이 되기도 한다.
현실을 마주하면 상상은 힘을 잃는다.
막연했던 두려움은 구체가 되고, 구체가 된 순간부터
사람은 다시 움직일 수 있다.
도망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언어도 이 지점에서는 의외로 정직하다.
광야를 광야라고 부르고, 십자가를 끝까지 십자가로 남겨둔다.
고통을 지워주기보다, 고통이 혼자가 되지 않게 한다.
그래서 “여기가 끝은 아니다”라는 말은
가벼운 위로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선언에 가깝다.
사람은 종종 기대한다.
어두운 터널 하나만 지나면
숨통이 트이고, 기쁨만 남을 것이라고.
그래서 버틴다.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막상 터널을 지나고 나면
기쁨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그 자리에 상실이 함께 남아 있다.
통과란 언제나 무언가를 얻는 동시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장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형태가 바뀌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얻음만 있는 회복은 없고, 잃음 없는 통과도 없다.
기쁨과 애도는 대개 함께 도착한다.
삶은 그렇게 한 번에 정리되지 않은 채로 이어진다.
앞으로 나아간 것 같다가도 다시 복잡해지고,
숨은 쉬어지는데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그리고 끝에 남는 것은
분명한 해답이 아니라 이런 풍경이다.
터널은 끝나지만 의미는 바로 정리되지 않는다.
기쁨은 단순하지 않고, 상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삶은 다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