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은 멀쩡한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쉰두 번째 이야기

by 이지

예전에 인천의 한 신축 아파트에서 혹파리 떼가 쏟아져 나왔다는 뉴스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수억 원을 들여 이사한 새 집인데, 붙박이장 틈새마다 벌레가 기어 나왔다고 합니다. 시공사는 방역을 약속했지만 이미 입주민들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겉으로는 최신식이었고 설비도 완벽해 보였지만 정작 가장 기본적인 것, ‘살 수 있음’이 빠져 있던 집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겉은 멀쩡한데 속이 무너진 상태. 완성된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이 빠진 구조.

아마 우리의 삶도 비슷한 모습일지 모릅니다. 더 편리한 기능, 더 화려한 외형을 갖췄지만 정작 안쪽에서는 계속 불안이 새어 나옵니다.

노자는 이런 상태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천하의 어미를 잃은 세상.”

노자는 모든 것에는 ‘어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거기서 나왔고 그 품에서 길러졌다는 뜻입니다. 그 어미를 알면 자식이 보이고, 자식을 알아도 다시 어미로 돌아오면 평생 위태롭지 않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꾸 바깥으로만 나가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더 보고, 더 듣고, 더 성취하려고 마음을 계속 열어 둡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구멍을 막고 문을 닫으라고.

이 말은 세상과 단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욕망과 과잉된 자극을 잠시 멈추라는 말입니다. 밖으로 흩어질수록 사람은 고갈되고, 안으로 돌아올수록 다시 살아납니다. 그 고요한 자리, 그 중심이 바로 근본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기능과 외형의 시대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로 평가되고, 신앙조차 얼마나 아는지로 가늠됩니다. 그러나 기능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기능은 언제나 ‘무엇을 위하여’의 도구입니다. 그 목적이 사라질 때 삶은 과열되고 사람은 스스로를 소모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이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본질 앞에서 멈추는 태도였습니다. 노자가 말한 ‘천하의 어미’도 바로 그 자리입니다. 아는 것을 늘리기보다 멈출 줄 아는 사람, 큰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 작고 부드러운 것을 지킬 줄 아는 사람. 노자는 그것을 ‘밝음’이라 하고 ‘강함’이라 불렀습니다.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니라 오래 가는 힘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기능과 체계에 집중할수록 복음은 점점 구조 속에 갇힙니다.예수님은 본질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빛을 비추셨지만 그 빛으로 사람을 압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열매를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붙어 있으라고만 하셨습니다.

신앙은 확장이 아니라 회귀입니다. 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붙드는 것, 더 바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 말보다 삶, 지식보다 사랑, 외형보다 근본.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이 순환, 그 길 위에서 삶은 다시 정돈됩니다.


사유의 한마디

겉이 아니라 근본이 무너지면 삶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어미를 지키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바깥으로 커지지만 생명은 안으로 깊어집니다. 돌아감이 곧 오래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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