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한 번째 이야기
우리 사는 세상은 ‘내 것’이라는 말로 가득합니다. 내 집, 내 일, 내 사람, 내 신앙. 아무리 쉐어링이 흥한다고 해도 내것은 중요합니다. 이렇게 ‘내 것’이라고 부르는 순간 마음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불안이 시작됩니다. 잃을까 봐, 변할까 봐, 내 손을 벗어날까 봐 불안합니다.
소유는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닫히게 합니다. 요즘 세대의 변화가 이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이른바 MZ세대는 일보다 삶을, 조직보다 자신을 앞에 둡니다. 이전 세대가 ‘더 가지는 삶’을 살았다면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키려 합니다. 그 사이에서 서로를 향한 말은 거칠어집니다.
한쪽은 말합니다. “책임감이 없다.”
다른 쪽은 말합니다. “꼰대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두 세대 모두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많이 가진다고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덜 가진다고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가지려 하느냐입니다.
붙잡으려는 손은 점점 굳어가고 내어놓는 손은 조금씩 열립니다.
노자는 이 관계의 비밀을 아주 짧게 말합니다.
“도는 낳고 덕은 기른다.”
생명은 붙잡을 때 자라지 않고 내어줄 때 자랍니다. 노자는 도와 덕을 ‘주인과 소유물’의 관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도는 생명을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덕은 생명을 기르지만 간섭하지 않습니다. 낳되 내 것이라 하지 않고, 기르되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돌봄을 노자는 ‘현덕(玄德)’이라 부릅니다. 깊고, 그윽한 덕. 낳는다는 것은 시작을 독점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자라게 하는 일입니다. 소유하지 않기에 생명은 숨 쉴 수 있고 간섭하지 않기에 존재는 자기 길을 찾습니다.
에릭 프롬은 인간의 삶을 두 방식으로 나눕니다.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입니다. 소유의 삶은 “무엇을 가졌는가”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존재의 삶은 “어떤 사람인가”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문제는 소유가 존재를 대신하는 순간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은 상대를 숨 막히게 하고, 존재를 품는 사랑은 함께 자라게 합니다.아이를 키우는 일도, 사람을 가르치는 일도, 공동체를 이끄는 일도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나는 지금 낳고 있는가, 아니면 붙잡고 있는가.
노자가 말한 ‘낳되 소유하지 않음’은 착한 말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기술입니다.
성경의 하나님도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소유의 방식으로 다스리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두셨습니다.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 속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라며 부르셨지만 강요하지 않으셨고, 흩어질 것을 아셨지만 매달리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랑은 붙잡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임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려 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려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집착이 아니라 신뢰이고, 간섭이 아니라 기다림입니다.
낳는다는 것은 내 것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붙잡는 능력이 아니라 내어주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지만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유 속에서 생명은 자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