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려고 애쓰다 삶을 놓쳤다

쉰 번째 이야기

by 이지

우리는 누구나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갑니다. 건강, 관계, 일, 명예, 심지어 신앙까지도요. 이 중 하나라도 놓치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은 불안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 줄을 붙잡은 손이 점점 굳어갈수록 삶은 가벼워지지 않고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요즘은 건강에 대한 염려조차 하나의 문화가 되었습니다. 몸에 좋은 음식, 정기 검진, 각종 영양제와 루틴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에 대한 집착이 건강을 해칩니다. 불안이 몸을 병들게 하고 완벽을 향한 강박이 삶을 잠식합니다.

노자는 아주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어떤 사람은 일찍 죽고, 어떤 사람은 잘 살다가 쓰러지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가? 라고요.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삶에 너무 두껍게 매달렸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애쓴다는 명분 아래 우리는 이미 삶을 잃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노자는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편에 두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어남은 나오는 것이고, 죽음은 들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서로의 내부를 오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삶을 붙잡는 순간 그 흐름은 끊어집니다. 내 생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오히려 죽음의 통로를 열어 줍니다.

반대로 생사에 초연한 사람은 죽음이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그는 막히지 않고 흘러갑니다. 노자가 말하는 ‘삶을 잘 간직하는 사람’은 생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생명을 맡깁니다. 그래서 찔릴 곳이 없습니다. 호랑이가 할퀼 자리가 없고 무기가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붙잡을 경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에 충실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쉽게 이렇게 변합니다. 더 오래, 더 많이, 더 잘. 이 끝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삶은 자유가 아니라 의무가 됩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 했지만, 노자는 ‘죽음을 품은 존재’라 말합니다. 죽음을 밀어내는 사람은 죽음에 쫓기고, 죽음을 품는 사람은 삶의 중심에 섭니다.

삶의 목적을 붙잡으려 하지 않고 삶의 흐름을 맡길 때 비로소 생명은 자리를 찾습니다. 집착은 경계를 만들고, 무심은 경계를 녹입니다. 그래서 무심한 사람에게는 죽음조차 닿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무심을 믿음이라 부릅니다. 믿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 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줄 아는 자유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를 내어놓음으로 생명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죽음의 여지를 없애버린 사랑의 절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오래 사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가’를 가르치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잃지 않으려는 불안에서 벗어나는 순간, 비로소 진짜 살아 있음이 시작됩니다.


사유의 한마디

삶을 붙잡는 손을 놓을 때 죽음의 틈은 닫히고 하나님의 생명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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