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마음을 이기려다
관계를 잃었다

마흔아홉 번째 이야기

by 이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마음이 부딪히고 감정이 엉키며 이해되지 않는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해결책은 끊어내는 것입니다. 연락을 줄이고, 거리를 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것. 그러면 잠시 평안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켠에는 늘 공허함이 남습니다.

다른 선택지는 고치려 드는 것입니다. 설득하고, 설명하고, 왜 그게 문제인지 알려주려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바꾸려는 시도는 대부분 또 다른 상처를 남깁니다.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먼저 내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판단할 때 그 안에는 종종 나의 그림자가 비칩니다. 결국 관계의 핵심은 승부가 아니라 이해입니다.

노자는 이것을 아주 짧게 말합니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노자가 말한 건 ‘무상심(無常心)’입니다. 무상심은 원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절대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재단하기보다 그 마음에 함께 머무는 것. 그게 노자가 말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선하게 대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도 믿음을 주고, 믿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믿음을 준다.

이것은 도덕적 평가가 아니라 관계적 태도입니다. 먼저 선하게 대하면 선함이 생기고, 먼저 믿어주면 신의가 자랍니다.

그리고 노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성인은 사람들을 아이처럼 대한다."

아이처럼 통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르치라는 뜻도 아닙니다. 아이를 대하듯 기다려 주라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는 사람을 빠르게 분류합니다. 성격유형, 데이터, 통계, 정치 성향, 소비 패턴. 그러나 그렇게 모든 관계를 정리하려 들수록 사람의 깊이는 사라집니다.

노자는 이미 이 한계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성인은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

이 말은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그의 고통 안에서 내 마음을 다시 발견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공감의 기술이 아니라 공감의 용기입니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 깨어나는 윤리’와도 닮아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비효율적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즉각적인 보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아이를 대하듯 기다립니다.

노자가 말한 덕은 성과가 아니라 포용의 능력입니다. 내 기준을 내려놓을 때, 타인의 마음이 들어올 자리가 생깁니다.

성경은 이 길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은 상대를 이기는 힘이 아니라 품는 힘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베드로의 배반 이후에도 그를 다시 부르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자기 마음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자기 안으로 들이신 분, 그분이야말로 ‘무상심’을 지닌 성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옳음을 증명하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살리는 태도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가정 안에서도, 누군가를 고치려 하기보다 아이처럼 품어주는 마음. 그곳에서 신의가 자라고 믿음이 회복됩니다.


사유의 한마디

상대의 마음을 이기려 할수록 관계는 멀어집니다. 내 마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그 자리에 들어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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