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여섯 번째 이야기
요즘 세상을 보면 말이 넘쳐납니다. 뉴스도 많고 해설도 많고 토론도 많습니다. 누군가는 정의를 말하고 누군가는 인권을 말하고 누군가는 진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말은 점점 많아지는데 세상은 조금도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더 크게 말하고 더 많은 논쟁을 벌이지만 결론은 늘 비슷합니다. 서로 더 멀어집니다.
이럴 때 노자는 짧은 한 문장을 남깁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노자의 말은 세상을 향한 냉소가 아닙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처럼, 그는 진리의 무게를 아는 사람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입을 막고 문을 닫고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하라고요.
그 상태를 그는 ‘현동(玄同)’이라 부릅니다. 현묘하게 하나가 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입을 닫고 문을 닫는다는 침묵은 도망이 아닙니다. 세상을 외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것, 쉽게 규정하지 않는 것, 자기 빛으로 세상을 덮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벼가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지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말을 줄입니다. 왜냐하면 말의 한계를 알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의 말은 입을 다물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랑, 정의, 신, 선 같은 단어는 너무 그 범위가 크기 때문에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말은 진리를 담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입니다. 노자도 같은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하라.”
자신의 빛을 세상 위에 비추려 하지 말고 세상의 먼지 속에서 함께 머무르라는 뜻입니다. 진짜 지혜는 자기 빛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그 빛을 조용히 나누어 가집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고 이롭게도 해롭게도 할 수 없다고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미 세상의 기준을 넘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예수님은 말하는 신앙보다 살아내는 신앙을 말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의 차이는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느냐가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았느냐에 있습니다.
노자가 말한 ‘말하지 않는 앎’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말보다 삶으로 드러난 사랑과 닮아 있습니다.
진리는 설명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복음은 논쟁보다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그 사랑은 말보다 더 진하고 묵직합니다.
빛을 줄이고 먼지 속에 머무는 사람. 그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진리는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조용한 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