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 번째 이야기
사람은 본능적으로 통제하고 싶어 합니다. 가정에서는 자녀를, 직장에서는 후배를, 사회에서는 국민을 통제합니다. 통제의 목적은 질서입니다. 어쩌면 굉장히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통제가 많아질수록 불안도 함께 늘어납니다. 규칙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그 규칙을 피하는 방법을 배우고, 감시가 강해질수록 신뢰는 빠르게 사라집니다.
그러고보면 사회는 ‘관리’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을 합니다. 정책도 늘어나고 규정도 늘어나고 법도 계속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관리 시스템이 정교해질수록 사회는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노자는 이 현상을 이미 오래전에 말했습니다.
“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꾀로 군대를 쓰며 아무 일도 하지 않음으로 천하를 얻는다.”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는 방임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금기가 많을수록 백성은 더 가난해지고, 이익의 도구가 많을수록 나라는 더 혼란스러워지며,기술이 많을수록 욕망이 더 늘어나고, 법령이 많을수록 도적이 더 많아진다고요.
그래서 성인은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백성은 스스로 변화하고, 나는 고요함을 좋아하지만 백성은 스스로 바르게 되며, 나는 일에 매달리지 않지만 백성은 스스로 풍족해지고, 나는 욕심을 내지 않지만 백성은 스스로 순박해진다고요.
노자가 본 세상의 병은 과잉이었습니다. 법이 많을수록 편법이 늘고, 기술이 많을수록 속임이 늘며, 도덕을 강조할수록 위선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 않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노자의 무위는 무력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잉된 의지의 절제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 문명의 위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만들고 계산하고 조정하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의 리듬을 잃어버립니다."
노자는 그 흐름을 거슬러 이렇게 말합니다.
“고요함을 좋아하라.”
고요함은 소음을 피하는 상태가 아니라 사물의 본성에 귀 기울이는 태도입니다. 고요함 속에서 일의 본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무위는 효율의 철학이 아니라 지속의 철학입니다. 억지로 세운 것은 빨리 무너지고, 자연스럽게 자란 것은 오래 갑니다.
성경에도 이 통찰이 있습니다. 율법은 원래 사람을 무엇이든 제한적으로 옭아매는 '우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율법을 서로를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서를 다시 세우셨습니다.
거룩함은 규칙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상을 품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려 함이라.”
복음은 사람을 억지로 바꾸지 않습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제로 통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부르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부르심 속에서 변합니다.
하지 않음은 무능이 아닙니다. 사랑의 용기입니다. 통제하지 않을 때 신뢰가 자랍니다. 억지로 하지 않을 때 사람은 스스로 변합니다.무위의 자리에서 세상이 조용히 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