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_잘 살았다
잘 살았다. 이 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살아왔다. 나를 쫓는 이는 없었다. 외로운 그림자 하나만이 나를 뒤따랐다. 그럼에도 나는 매 순간 달렸다. 내 앞에 덩그러니 놓인 거울을 보지 못한 채 그저 추월하고자 했다. 태어나길 둘째라 늘 내 앞에 누군가 있는듯했다. 아프기도 많이 아팠으며 그게 또 엄마를 아프게 하기도 했다. 이런 내게 막내의 자리를 내어줄 동생이 잠시 다녀갔었다. 털은 하얗기도 엄청 하얗고 코는 까맣기도 엄청 까매서 콩이라 불렀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나름 고민을 거듭하고 거듭한 뒤 부르게 된 이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후회했다. 나에겐 하나뿐이고 절대 둘이 될 수 없는 존재인데, 너무나도 흔한 이름을 지어준 것이, 이 세상에 콩이라는 존재가 넘쳐나는 것이. 그래서 내가 아닌 누군가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꼬리를 흔들며 내 마음속에서마저 달아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콩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고,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흰머리에도 생각이 나, 기어코 나를 웃게 한다. 우린 내 나이가 두 자리 되던 해에 만나 많은 걸 함께 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미래를 정하고 꿈을 꾸던 때,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절대 직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울며 다짐하던 때, 콩이는 눈치 없이 나가자고 보채곤 했다. 함께 걸으며 깜깜한 하늘엔 보이지 않는 별을, 내 어두운 마음에 찍곤 했다. 그 뒤로도 나는 생각이 많을 때곤 밤에 혼자 노래를 들으며 걸었다. 손에 들린 초코우유가 커피를 지나 유자차가 되어도 나는 밤길을 걸었다. 끝엔 나와 함께 걸어주는 이도 있었다. 우리는 운명처럼 만나 강산이 수차례 변한 대도 소나무같이 사랑이라는 걸 했다. 내 인생 가장 모순뿐이던 날을 함께하기도 했다. 가장 행복해서 가장 많이 울던 날. 새하얀 결혼식.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아직도 그 감사함에 숨을 크게 들이쉴 만큼 나를 위해 참으로도 많은 이들이 걸음 해주었다. 나의 기쁨에 쓴 그들의 시간의 가치를 결코 빛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또 달렸다. 나는 그렇게 그와 머리 색이 빠질 때까지 함께 했으며 곧 다시 만나 두 손 마주 잡고 걸어 나갈 것이다.
내 인생엔 유난히 꽃이 많이 폈다. 그만큼 많은 낙엽이 지기도 했다. 낙엽이 져 거리를 가득 채울 땐 꽃이 피기 위함임을 지금 와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던 내 꿈을 단지 예쁘게 만들어둔 길이 없어서, 멀리 돌아가기 싫어서 뒤돌아 계단으로 내려오던, 교복 치마 흩날리는 나에게 말한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더니, 연필 잡기 늦었다 생각하던 때에 넌 글을 쓴다고. 후회 없다는 듯 뒤돌아 내려오더니, 결국 넌 그 꿈을 아주 오래도록 가슴 한편에 피우고 있었다고. 지금의 내가, 허리가 굽고 머리가 희어서 이제 앞을 보고 걷기보다 멈춰 서서 걸어온 길을 바라보고만 있는 내가, 한 번의 꿈을 꾼다면 나는 그 계단을 등지고 울퉁불퉁한 그 길을, 낙엽으로 뒤덮인 그 길을 예쁘게 닦아서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을 것이다. 삶이라는 길 끝에서 뒤를 돌아 내 눈에 담아진 내가 걸어온 길은 그저 계단뿐이라, 비가 내릴 땐 우산을 들고 하염없이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해서, 매 순간을 달렸음에도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다. 날 뒤따르던 외로운 그림자 말고 그 누가 날 위해 울어줄지, 날 잊지 않고 종종 떠올려줄지 많은 생각이 들어, 가던 길 않고 이 글을 쓴다. 날 기억해 주십시오. 종종 날 그리워해 주십시오. 그 눈물이 종이를 적셔 내 마지막 한마디의 마침표가 되어줄 것입니다.
잘 살았다
끝으로 처칠의 말을 빌린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여 낙엽길을 걷고 있다면 계속해서 나아가라. 왜 낙엽에서 멈추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