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의 눈물

글_빨간불의 시작

by 이네

똑. 똑. 위태위태하게 매달리던 빗방울이 결국 잎을 타고 미끄러진다. 아침만 해도 싱그럽게 피어있던 꽃은 후두둑 떨어져 제 색을 잃고 여기저기 짓물린다. 저기 가는 저 이의 신발 바닥에 붙은 검붉은 장미는 어이가 없을 거다. 바쁜 출근길 마다하고 이쁘다며 뒤통수고 정수리고 할 것 없이 사진을 남기더니 물 좀 먹어서 무거워졌다고 매정하게 짓밟고 가다니. 아, 물론 나는 아주 튼튼한 잎을 골라 달을 보고 누워 이 새벽의 조용함을 귀에 담고 있다. 간간이 자동차 경적 소리, 찰박찰박 빗길을 걷는 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머물다 가곤 했지만 구경거리가 없어서 하품만 나온다. 보이는 거라곤 빨려 들어갈 듯 새까만 하늘과 둥글다 만 달뿐.

눈을 떴다. 언제 감았는지도 모를 눈이 떠졌다. 아닌가. 아직 꿈인가. 어째 해만 시끄럽게 떠 있고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다. 아, 알겠다. 여기는 무지개다. 내가 지금 무지개 위에 서 있다. 게으른 비 친구들이 일찍이 집으로 돌아갔나 보다. 자는 나도 깨워서 같이 가지. 이웃사촌끼리 매정하게 이러기 있나. 덕분에 잠을 깊이 잤는지 물방울이라곤 나 혼자 덩그러니 있다. 이 무지개 나라에서 나, 어쩌면 외국인일지도 모르겠다.

터벅. 터벅. 나는 지금 걷고 있다. 이들이 입혀주는 빨간 옷을 입고 지치는 줄 모르고 달려도 보고, 아무도 없겠다 춤도 췄다. 곧 굴러도 볼까 한다.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메리가 결혼식 중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웃으며 달리던데. 마침 나도 빨간 드레스다. 여기는 비가 들어올 수 없어서 바람뿐이지만 뭔들 만족한다. 아쉬운 게 있다면 허전한 옆자리랄까. 팀(영화 <어바웃 타임> 남자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공기 씨가 대신해줘야겠다. 느껴지진 않지만 잡았다 치는 손을 앞뒤로 날아갈 듯 흔들며 다시 달린다. 마치 메리처럼 있는 힘껏 웃어도 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이상하게 웃음만 나온다. 옷의 힘이란 그런 건가 보다. 바람을 가르고 한참을 달려서 그런가 옷이 조금 마르면서 주황빛이 돈다. 잊고 있던 해가 존재감을 드러내니 내가 눈 부신 줄도 모르고 달렸구나 깨닫게 된다. 햇볕에 기대 잠시 숨 좀 돌려야겠다. 그 자리에 철퍼덕 앉아 아빠 다리를 하곤 해를 가리니, 손 틈 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들 사이로 부지런한 참새도 보이고, 커다랗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구름도 보인다. 천천히 떠가는 구름을 눈에 담다가 누가 볼세라 슬쩍 흘린 침을 닦았다. 가만히 눈을 뜨고 있자니 달릴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들어와 하나라도 놓칠까 꼼꼼히 주워 담았다. 내가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던 구름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갈라지고, 다신 안 볼 것처럼 등 돌리고 있던 구름들은 어느샌가 손을 마주 잡고 나아가고 있다. 그 위를 헤엄치듯 지나는 비행기 안에도 여러 구름들이 보인다. 어떤 구름은 자신보다 품에 안은 이를 챙기는가 하면 어떤 구름은 눈길조차 아깝다는 듯 잔뜩 얼굴에 주름을 만들고 눈을 꼭 감고 있다. 내 안에 들어온 수많은 구름들이 벅차 와, 숨을 크게 가져오며 나도 눈을 감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어떤 구름인가. 아, 나는 물방울이지.

너무 오래 쉬었나 보다. 하마터면 아까부터 해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 이 낮에 감성에 젖을 뻔했다. 생각과 함께 먼지도 털어낼 겸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옷에 주름이 펴지고 지고를 반복하며 초록물이 사방으로 튄다. 이 와중에 손은 아직 엉덩이에 있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이게 안 떨어진다. 내가 햇볕이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는 일명 손덩이(손과 엉덩이의 합성어) 구름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손덩이 물방울로 남은 생을 보낼 순 없으니 젖이 아닌 물먹던 힘까지 다해 손을 떼어내고자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성공이다. 다행히 손을 엉덩이로부터 멀리하는 것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다만, 나의 왼손은 초록의 손에 다다랐다. 저 비행기를 보며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던 때라면 내가 또 언제 초록의 손으로 살아보겠나 싶어 콧노래 부르며 넘겼을지 모른다. 근데 지금은 말이 다르다. 매우 기분이 언짢다. 아무도 없지만 아무나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괜히 발을 질질 끌며 큰 소리를 만들어내면서 걸었다. 불과 몇 분 전의 나를 원망하면서. 왜 하필 그 시간에 그곳에 그 자세로 앉았을까. 이 광활한 하늘보다도 끝이 없는 생각을 거듭하며 걸었다. 오른손은 주먹을 꼭 쥔 채로. 그 어떤 구름보다도 틈 없이 빽빽하게.

걷다 보니 내가 얼마나 열을 내고 있으면 저 매서운 해마저 꺾였나 싶다. 홀로 이 길을 거닐고 있으니, 새삼 혼자라는 게 느껴지게 외로운 바람이 지나쳐간다. 얼마나 많은 바람이 날 지났을까, 마침내 옷에 스며들어 하나의 바다를 그려낸다. 하나뿐인 해와 하나뿐인 무지개. 그 사이의 하나뿐인 물방울. 그게 작은 바람에도 큰 파도를 일으킨다. 혼자라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면서도 어느 것도 할 수 없게 만든다. 저기 지나는 새가 보는 나는 지금 잔잔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 홀로 놓인 돛단배다. 이 돛단배는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가만히 떠 있는 거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함께할 사공이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렇다면 차라리 사공이 차고 넘치고 흘러서 산으로 가는 게 낫겠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라도 가지, 사공이 없으면 배가 가라앉는다.

나는 지난날처럼 아주 튼튼한 무지개를 골라 달을 보고 누워 이 고요함을 귀에 담고 있다. 간간이 귀에 바람이 스치고, 마음의 파도 소리가 머물다 가곤 했지만 함께하는 이가 없어서 눈물만 나온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빨려 들어가고픈 새까만 하늘과 둥글지 못한 달뿐. 나는 그렇게 밤의 색을 담는다.

마음의 파도가 상처를 만들고 시간이 흘러 그 자리는 보랏빛의 멍이 자리 잡는다. 오늘은 왜 이렇게도 화창한지 그럴수록 나의 존재가 투명해진다. 무지개는 선명해지고, 마침내 나는 무지개의 눈물로 남기로 했다.

똑. 똑. 위태위태하게 매달리던 빗방울이 결국 잎을 타고 미끄러진다. 아침만 해도 선명하게 피어있던 무지개는 제 색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저기 가는 저 이의 앞에 있는 새하얀 구름은 어이가 없을 거다. 바쁜 출근길 마다하고 이쁘다며 뒤통수고 정수리고 할 것 없이 사진을 남기더니 홀로 남았다고 매정하게 돌아서다니.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신호를 기다리며 달리는 차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다가 빨간불에 멈춰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문득 ‘나에게 빨간색은 정지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답이 이 무지개의 눈물을 쓰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빨간색은 정지가 아닌 출발이다.”

빨간 열정을 품은 물방울이 파란 눈물을 지나 보랏빛 멍을 담고 결국 무지개의 눈물로 남은 이야기. ‘나에게 무지개색은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감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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