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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송 Feb 23. 2023

애증의 돌잔치(1) : 누구의 돌잔치인가

돌잔치 주인공을 찾아서

돌잔치. 돐, 돌.

아기의 첫 생일로 예로부터 돌잔치는 아기가 1년 동안 잘 커왔고 또 앞으로의 날들이 번영하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크게 잔치를 해주었다.

 아이가 9개월 즈음이 되었을까 돌잔치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내가 돌잔치 준비할 때만 해도 가능했지만 요즘에는 두 달 전 준비라면 늦는다고 한다. 장소부터 스냅까지 6개월 전에는 준비해야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마저도 전화예약에 성공해야 가능하다는 사실!)

 나는 예전부터 소규모 돌잔치를 하고 싶었고 대신 호텔 돌잔치로 작지만 나름 럭셔리한 돌잔치를 꿈꿔왔다. 양장과 한복 두 가지 컨셉이 모두 어울리고 아이가 최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날이자 장소이길 원했다. 남편에게 의견을 묻자 남편도 정말 좋은 생각이라며 나의 생각에 동조해 주었다.

그래서 들뜬 마음을 안고 신나게 돌잔치 장소 물색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에서 살짝 언급했듯이 이미 유명하다는 호텔들은 예약 시기 자체도 지난 상태였다. 나만 이렇게 게으른 엄마였다니…! 다들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아무 생각 없이 있던 나를 탓하게 되었다. 장소뿐만이 아니었다. 겨우 장소를 섭외하고 다음 단계에 돌입하고 보니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돌잔치 스냅 업체들도 문의하는 족족 ‘죄송합니다. 이미 예약이 마감된 날짜입니다.‘ 답변만 들어서 성질이 날 정도였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돌잔치에 출장 메이크업도 알아보니 3군데에서나 또 까였다. 까임(?)의 연속을 뚫고 여기저기 문의한 결과 돌잔치 준비를 거의 마칠 수 있었다.

돌잔치 준비는 결혼식을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흔히 결혼 준비의 대표주자인 스튜디오, 드레스, 메이크업인 스드메를 예약하듯 돌잔치도 마찬가지였다. 장소, 스냅, 드레스, 메이크업, 돌상까지 결혼 준비보다 더 힘들었다. 결혼할 때는 웨딩플래너라도 있었는데 돌잔치 플래너는 없어서 아쉬울 정도였다.

그렇게 내가 그려왔던 돌잔치의 윤곽이 거의 그려질 무렵 남편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엄마가 돌잔치 크게 하고 싶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오빠네 친척들은 지금까지 돌잔치를 크게 해 왔기 때문에 시부모님께서 다른 가족 돌잔치에 늘 참석하셨다고 한다. 뿌린 대로 거두고 싶으신 마음인지 당신 손주 자랑을 그렇게 하고 싶으신건지 돌잔치를 온친척 다 부르는 그런 돌잔치를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으신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결혼하고 난 후 한번도 돌잔치에 초대된 적이 없었으니 우리 아이 이전 돌잔치 시기는 적어도 5-6년 전이었다. 그 정도면 이제 돌잔치 문화도 인식도 바뀌는 시대인데 누가 요즘 크게 돌잔치를 하는가… 나는 오히려 돌잔치 한다고 친척들을 부르면 민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굳이 꼭 돌잔치를 ‘크게’ 하고싶으시다는 거다. 물론 오빠 쪽 친척들은 나와 생각이 달라서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돌잔치에 참석해주실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매우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시부모님의 말씀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 이 돌잔치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되돌아보았다. 일단 내 새끼 돌잔치인데 왜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지 서러웠다. 결혼식도 아니고 돌잔치인데 당연히 우리 마음대로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내 자식 일이니 내가 하고픈 대로 하고 기쁜 자리에 시부모님을 초대하여 잔치를 하는게 순리 아닌가 싶었다.

두 번째, 시부모님은 우리가 어른이니 우리가 하자는 대로 따라야한다는 의식이 강하셨다. 그렇다면 나의 부모님은 어른이 아니란 말인가? 내 부모님은 요즘 돌잔치 한다고 친척 부르면 부담스럽기나 하니 차라리 소규모로 우리끼리 하면 더 좋겠다는 입장이셨다. 왜 나의 부모님 의견은 존중하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늘 시부모님 생각이 더 옳고 따라야하는 거라고 주장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세 번째, 그런 이야길 들었을때 주춤한 남편이 더 미웠다. “엄마 무슨 헛소리야?”라고 바로 끊어내야 하는 일인데 그것을 자기 가족의 문화이니 어쩌니 하면서 나를 설득하려하는 태도가 꼴보기 싫었다. 결혼 초기 시어머니가 우리집 가풍을 따라야한다고 했던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며 과거가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한번 터진 문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구나… 난 여전히 결혼이라는 건 그 어느 쪽의 가풍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나와 내 남편의 가풍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이미 내가 몇 백통의 전화를 돌려가며 장소를 정했고 열심히 돌잔치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시부모님에게 그건 중요하지도 알고싶지도 않은 것이었고 의미가 없는 헛지거리였다. 시어머니는 내가 바로 순종적인 태도로 나오지 않자 한술 더 뜨셨다. 소규모 돌잔치에 안갈테니 너네끼리 알아서 호텔에서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오빠를 협박했다.

오빠는 자기 부모님 없는 돌잔치를 하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나에게 어차피 한번 하는 돌잔치인데 우리 친척 좀만 더 부르면 안되냐고 애원하는 눈치였다. 호텔에서 50명 이상의 돌잔치는 할 수도 없었고 예산도 초과이다. 인원이 늘어나면 다시 합리적 가격대의 돌잔치 장소를 알아봐야했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나와 시어머니는 팽팽하게 대립각을 세웠고 남편은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게 우리 아이의 험난한 첫 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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