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엔 다녀오셨겠죠?
며칠 전 아버지가 계신 파주에 다녀왔다. 비석 양쪽에 놓인 돌꽃병 속의 조화가 색이 바랜 채 꽂혀있다. 지난 설날 즈음에 놓아 드린 꽃이다. 늘 그렇듯이 그새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나의 아버지는 실향민이다. 평안북도 용천군. 압록강 주변 어디쯤일 게다. 중학생 나이에 그 강을 넘어 만주로 당시 일본군을 피해 집을 떠난 후 다시는 본가로 돌아가지 못하시고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셨다.
해방과 전쟁의 시기를 고향을 떠나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내셨다.
아버지의 이름 마지막 글자는 巍(외)를 쓰셨다. 이 글자는 '왜'라고도 읽힌다고 하셨고,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게 되면 다시 '외'로 쓰신다 하셨다. 어쩌면 그게 아버지가 고향을 그리워했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어느 날 그냥 '외'로 쓰신다고 하셨는데 이때가 아마도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상심이 어느 정도였을지 헤아리기 힘들다.
여름 무더위가 살포시 가라앉을 무렵 난 병원 응급실에서 아버지와 단 둘이 밤을 지새웠다. 무척이나 고단한 모습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께 푹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아침이면 의사들이 싹 낫게 해 줄 거라고 몇 마디 말을 건넸다. 무어라 짧게 대답하셨는데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아버지와 나누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아침이 오자 눈에 띄게 달라진 아버지의 행동과 말투에 그제야 심각함을 알았고, 검사가 끝난 후엔 그나마 남아있던 의식과 감각마저도 잃어버리셨다.
아버지는 집에서 돌아가셨다. 대략 반년 정도 감각과 의식이 없으신 상태로 계셨는데, 병원에서도 더 이상 조치할 게 없으니 집으로 모시길 권했었고, 당시는 지금처럼 요양병원 같은 개념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날 집에는 간병인과 어머니가 계셨는데, 그저 조용히 누워계셨기에 누구도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채 그렇게 홀로 떠나버리셨다.
내겐 사실 남아 있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거의 없다. 아마도 그 시절의 많은 아버지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살아내기도 빠듯했을 것이고, 나는 나의 시절을 살아갔으니.
오늘은 비가 온다.
샤워를 마치고 거울에 맺힌 습기를 걷어내니, 그곳에서 나의 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계신다. 조용히 말을 건네본다.
"아버지, 고향엔 다녀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