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처 지우기

삶을 다시 돌아보며

by 채니아빠

퇴직을 하고 가장 먼저 했던 일은 휴대폰에서 연락처를 삭제하는 것이었다. 천명 가까운 연락처와 2천 개나 되던 톡방을 모두 지우는데 며칠이 걸렸다.

침대 위에 엎드려 핸드폰에 남겨진 지난 흔적들을 모두 훑어보며 남겨야 할 것과 보내야 할 것을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 지난 거래처 사람들과 업무 내용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오랜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던 지인들은 01* 번호에서 010으로 변경되면서 자연스레 정리되었었고, 이번에 정리한 연락처는 주로 업무와 연결되어 만났던 사람들이기에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사회에서 만나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은 주로 업무 관계로 만났던 이들이기에 개개인들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다만, 그 모든 연락처를 지우면서 내가 느낀 것은 나에 대한 일종의 부정이었기에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 버린 기분이 들어 한편으로는 아픔이었다. 톡방의 내용들을 다시 훑어보면서 '아, 내가 이런 일들을 했었구나. 이제 이 분야의 일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겠네. 수십 년을 쌓아 놓았던 인맥들을 이렇게 정리하게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는 관계를 그동안 그리 소중하게 여겼다는 게, 그리고 그 하나하나의 연락처를 얻기 위해 낯선 곳을 헤집고 다녔다는 게 허무했다. 단지 관계의 허무함 뿐만 아니라 나의 지난 삶도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는지라는 라는 회의감도 들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해 그리도 애를 썼던 것인지.


결국 살아남은 연락처는 몇 십 개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아파트 관리 사무소, 요양보호사, 병원, 은행 같은 생활용 전화번호를 제외하면 그 마저도 남는 게 별로 없다. 반백 년을 넘게 살아왔는데 잘 살아온 건지 아니면 뭔가를 놓치며 살아 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미련을 뒤로하고 일단 모두 지워버렸다.


4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 본다.

내가 살아 가는데 그리 많은 인간관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은 아직도 내게 남아 있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이들이 지금도 내 곁에 있으며, 그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다.


사람들은 종종 오랜 친구들을 만나면 추억들을 꺼내 보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기쁨이 있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오랜 친구들을 만나도 그 시절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내년 정도에 하고픈 일에 대한 얘기들을 한다.

난 젊었을 때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없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이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마 그랬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 보다도 난 지금이 좋다. 번잡하지 않고 단순하지만 이 안에서 나는 나이기에, 그저 나로 있을 수 있기에 지금을 사랑한다.


어두워진 저녁 써니와 맥주 한잔하고 싶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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